[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애플TV 드라마 <머더봇(Murderbot)>의 원작인 마샤 웰스 작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 중 2권(1권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 리뷰는 여기에 있습니다!).
2권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이라 1권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어지는 시리즈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익스큐즈 되는 거 아닌가 싶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은 <해리 포터> 시리즈 2권이니까 ‘해리, 헤르미온느, 론이 2학년이 되었고, 새로운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가 도착한다’고 소개한다고 해서 큰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래서 2권 초반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머더봇이 존경하는 멘사 박사네 팀을 떠나, 자신이 일으킨 학살의 정황을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머더봇. 그는 수송선을 타고 자신이 사건을 일으켰던 라비하이랄 광산으로 향하는데…
머더봇이 잡아 탄 수송선은 머더봇이 ART(Asshole Research Transport, 재수 없는 연구용 수송선)라고 부르는, 장거리 연구용 선박이다. 이 ART는 아주 쉽게 머더봇의 피드에 들어가 머더봇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수송선은 처음부터 머더봇이 “탈주한 보안유닛”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엄청나게 강력한 계산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 머더봇은 ART에게 엔터테인먼트 피드를 보여 주고 ART는 이에 흥미를 가진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미디어를 재생할 때 [ART는] 그 맥락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녀석이 제대로 이해하려면 드라마에 대한 내 반응을 읽어야 한다”. 미디어를 그냥 보는 걸로는 이해가 안 되니까 머더봇 같은 존재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는지(예컨대 어떤 장면에서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지, 긴장하는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같이 드라마를 보는 친구 비슷한 존재가 된다. 정확히는 ART가 머더봇의 뒤통수에 딱 들러붙어서 목에 숨결을 뿜어대는, 귀찮은 녀석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건 현실적이지 않아.” 내가 녀석에게 말했다. “드라마는 현실적인 게 아니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이야기란 말이지. 그 점에 대해 불평할 거면 나는 그만 볼 거야.”
불평하지 않도록 참겠어.
녀석이 말했다. (가장 빈정거리는 말투를 상상해보라. 그러면 그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뛰어넘기>를 보았다. 녀석은 현실성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세 편을 보고 나자 녀석은 별 비중 없는 인물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동요했다. 스무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요 인물 한 명이 죽자, 녀석은 봇이 진단을 돌려야 하는 척하면서 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며 7분 동안 피드에 머물러 있었고 나는 재생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네 편 뒤에 그 인물이 다시 살아나자 녀석이 너무 안도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 에피소드를 세 번 보고서야 넘어갈 수 있었다.
주요 줄거리 중 하나의 절정 부분에서 우주선이 괴멸적인 손상을 입고 승무원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암시가 나오자 수송선은 겁이 나서 보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진짜였다. 겁이 나서 보지 못했다.) 그때쯤에는 나도 녀석에게 아주 관대한 기분이 되어서 기꺼이 한 번에 1~2분씩 보면서 천천히 에피소드에 익숙해질 수 있게 해주었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녀석은 가만히 있었다. 진단을 돌리는 척하지도 않았다. 10분 동안이나 가만히 있었다. 그 정도로 정교한 봇에게는 엄청난 처리 시간이었다. 그러더니 녀석이 말했다.
다시 보게 해줘.
그래서 나는 첫 에피소드부터 다시 보았다.
아니 이거 그냥 덕후 두 마리 아니냐고요! 🤣
ART를 타고 도착한 라비하이랄에서 머더봇은 자유롭게 이 구역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보안 자문 일자리를 얻을 것을 권한다. 그러면 이 구역에 볼일이 있는 증강인간처럼 보일 테고, 의심도 사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머더봇이 찾은 ‘고객’은 각각 라미, 타판, 마로라는 이름의 인간들이었다. 이 세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가 나오긴 하는데 아무래도 글이라는 게 시각적으로 확 정보가 전달되는 게 아니다 보니까 솔직히 세 명이 어떤 차이가 있는,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인물인지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애초에 1권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에는 오버스나 볼레스쿠 박사처럼 ‘보존 연합’ 탐사팀 일원이 두 명 더 있었는데 드라마 시즌 1에서는 이 둘을 잘라냈다. 솔직히 인물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어렵고 각 인물의 개성이 확 와닿지도 않았고). <머더봇> 시즌 2가 이 2권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와 3권 <머더봇 다이어리: 로그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제작된다고 들었으니 이 캐릭터들을 어떻게 비주얼적으로 표현할지 기대해 봐야겠다. 그래야 이 인물들 구분이 쉬울 듯… 사실 내가 이 책을 몇 번 반복해 읽으면 캐릭터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각적인 정보가 있어서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랑은 좀 다르지요… 게다가 2권은 여전히 ‘중편 소설(novella)’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정도로 소설의 분량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니 인물의 외모라든지 성격을 묘사하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는 거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2권에서는 1권보다 조금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나’를 알아나가는 머더봇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 머더봇의 여행이 어디서 끝날지, 과연 멘사 박사와 그 ‘보존 연합’ 팀으로 돌아오기는 할까 궁금하다(스포일러: 정말로 돌아온다, 4권에서). 3권 리뷰에서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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