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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유리, <기울어진 미술관>

by Jaime Chung 2026.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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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유리, <기울어진 미술관>

 

 

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나도 흥미롭게 읽은, 교양 수준의 미술 인문학. 제목에서 이미 감을 잡을 수 있듯, 한쪽에는 권력자들, 다른 한쪽에는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을 이 책의 두 가지 큰 축으로 설정했다. 권력(과 돈)을 섬기는 시녀 같았던(아니,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예술의 모습과 작품들에 표현된 소수자들의 모습을 동시에 살펴본다.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 중 충격적이면서 화가 나는 건 ‘창녀’로 잘못 알려졌던 막달라 마리아이다. 거의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던 성실한 제자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의 질투의 대상이었다.

신학자 하희정의 책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에 따르면 1945년 12월 이집트 나그함마디 사막에서 문서 뭉치가 하나 발견된다. 바로 ‘성서 밖의 성서들’이라 불리는 13권의 <나그함마디 문서>였다. 내용을 보면 전통파 교회 입장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왜 예수 부활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는지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예수가 가장 총애한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였음을 말해준다. <나그함마디 문서> 중 빌립 복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세주의 동료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나머지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셨으며, 그녀에게 자주 입 맞추곤 했다(친밀함을 표현하는 그 지역 특유의 인사법). 나머지 제자들은 이에 마음이 상하였다. (…) 그들은 예수께 여쭈었다. 왜 우리들보다 더 저 여인을 더 사랑하십니까? 구세주께서는 그들에게 왜 내가 저 여인을 사랑하는 만큼 너희를 더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제자 공동체 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특히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드러내놓고 적대했다. <나그함마디 문서> 중 토마스의 복음서 114장은 이렇게 전한다. “시몬 베드로가 여자는 구원에 맞지 않으니 마리아를 내보내자고 하자, 예수가 답하길 나는 그녀를 인도해 온전한 사람(Anthropos, 안드로포스)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너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숨결이 될 것이로되 온전한 사람이 된 여자는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이 사랑, 차별 없고 온전한 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뭐하나.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제자란 것들이 이렇게 여성 혐오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처지에 성별로 차별하고, 누가 더 사랑받는다고 질투하고, 이런 모습을 보이니 왜 남자들이 여자들보고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네들이 인정하기 싫은 점을 여자들에게 다 뒤집어씌우네.

이렇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예수의 죽음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철저히 배제된 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 교회 제도를 이루고, 부활에 의심을 품었던 사도들마저도 교회 주류 전통 속에서 왕좌에 올랐을 때, 예수의 가장 신실한 사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제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후려쳐도 되는 대상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었고 다른 남성 제자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메신저였다는 것도 못마땅한 사실이었다.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장 기발한 설명은 아마 중세 시대에 진지하게 제기된 다음과 같은 주장 아니었을까. “소식을 퍼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여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라는 이름까지 얻기도 했다. 그가 성 판매 여성으로 인식된 계기는 따로 있다. 시작은 59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였다. 그가 루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해 다음과 같이 그녀를 ‘회개한 창녀’로 설교한 것이다. “우리는 이 여인이 루가의 죄 많은 여인, 곧 요한이 마리아라 부르는 그 여인이자 마르코가 마리아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줬다고 말하는 그 마리아임을 믿습니다.”(복음서 강론 33편) 성경에서도 향유 부은 여성을 ‘죄지은 여자’라고만 말했을 뿐 성 판매 여성이었다는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때는 중세 말. 성적인 죄는 모두 여자에게 씌워지던 시대였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손쉽게 창녀로 치부됐다. 나중엔 아예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마저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해석됐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신학적으로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무형의 빈 공간(null)’이었다. 그녀에게 날을 세운 베드로의 정통파 교회가 기독교 주류가 되면서, 그 빈 공간은 너무도 쉽게 얼룩덜룩한 이미지로 더럽혀졌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건 아마 그가 유일하게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동굴을 찾아가서가 아닐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간 세 여자들 중 한 명이었다며. 남자들은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던 분께 뭐 해드릴 마음이 없었나 보지? 시몬이든 베드로든 누구든 간에, 그 동굴을 찾아갔으면 막달라 마리아 대신에 첫 목격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굴 탓해. 그리고 뭐, 막달라 마리아 말고 남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발견했으면, 그 소식을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안 알리고 혼자만 알고 있을 거였어? 누가 발견했든 당연히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게 보통, 일반적인 반응이 아닐까 싶은데… 무슨 소식을 퍼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 웅앵웅 하고 앉았는지.

여성의 말에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싶으면 예나 지금이나 그 여자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주장을 하는구나. 요즘에도 이런 일이 넘치는데 옛날, 심지어 신을 믿는 작자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게 참으로 놀랍다. 이래서 쥘 르페브르가 그린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가 탄생한 것이다(위키 아트 보기). 예수님 부활의 증언자이자 성경 속 영웅을 왜 이렇게 벌거벗은, 성적인 시선의 대상으로 그렸는지는 너무 뻔한 거 아닌가. 창녀라고 잘못 알려졌으니 이렇게 그려도 되겠다 한 거지. 참고로 막달라 마리아의 명예는 20세기에야 복원되었다. “1969년에야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철회했다. (…)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으나 회개해 성녀가 된 여자로 지칭되곤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권한을 제한시키고 남성에게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한 정통파 교부들이 승리한 증거다.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는 그렇게 효과적으로 ‘도둑질’당했다.”

 

‘정상성’에 대한 꼭지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헬렌 켈러의 진실도 충격적이다.

대중들은 켈러가 시각∙청각 장애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접하지 못해, 순백의 영혼을 지녔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켈러는 튀어나온 눈을 없앤 뒤 유리로 만든 파란색 의안을 새로 끼웠고, 수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췄지만 ‘불행히도’ 장애를 지닌 여성은, 사회가 편안하게 소화할 수 있는 안전한 이미지였다. 사람들은 동정이 깃든 눈길로 그녀에게 ‘숭배의 박수’를 쳤다. 헬렌 켈러를 향한 이 같은 ‘낭만적’ 시선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그림 <눈먼 소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시력이 없는 눈이라고 하더라도 제거하고 의안을 끼우는 일은 고통스러웠을 텐데. 방금 언급된 밀레이의 그림 <눈먼 소녀>는 이렇게 생겼다(위키페디아 보기). 장애인도 ‘예쁘고’ ‘순수’해 보여야 장애인인 게 인정이 된다니. 이 꼭지를 읽으면서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떠올랐다. 링크된 리뷰를 보면 아시겠지만 나는 여자는 아프면서도 예쁘고 명랑하고 밝아야 하냐며 분노했다. 이제 보니 그때에도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를 가져와서 예시로 들었네. 이 화가는 그냥 취향이 늘 그런 쪽이었나 보다.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가냘프고 도움이 필요한 여자들. 진짜 내 취향 아니네, 이 아저씨.

 

리뷰를 끝맺기 전, 이 책의 다른 기둥이기도 한 예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서도 최소한 한 가지는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잭슨 폴록의 그림이 일종의 미국 선전 도구로 쓰였다는 거 아셨는지? 잭슨 폴록 본인이 미국이 위대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개발했다는 건 아니고, 마침 어떻게 때가 잘 맞아떨어져 그가 이용당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냉전이 첨예하던 시대, 미국은 소련을 다방면으로 압도해야 했다.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경제와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법. 소련의 미술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미국의 얼굴을 한 예술’이 필요했다. 이 ‘문화전쟁’의 수행자로 나선 곳은 중앙정보국(CIA)이었다. CIA는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문화자유회의’라는 선전 기관을 비밀리에 만들어 첩보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 작전의 선택을 받은 미술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였다.
(…)
이 덕분에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은 CIA의 간택을 받을 수 있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와 달리 미국의 예술은 자유를 수호한다는 이미지가 필요했는데,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그의 화법은 이에 딱 들어맞았다. 전직 CIA 요원인 도널드 제임슨이 1994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듯 말이다. “우리는 추상표현주의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실제보다 더 형식적이고 고루한 데다가 틀에 박힌 미술로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은 ‘기다란 목줄(Long Leash)’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됐다. 조종하되, 목줄을 쥔 자의 모습은 긴 줄로 인해 쉽사리 보이지 않도록 진행한다는 의미였다. 예술계에 보이는 CIA의 관심을 은폐하는 데에 전면적으로 협력한 기관이 바로 뉴욕 현대미술관이었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CIA 산하기관 ‘문화자유회의’와 계약을 맺고 추상표현주의 띄우기에 나섰다.
성과는 엄청났다. 문화자유회의는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유력 잡지를 20종 이상 발행했으며, 국제 컨퍼런스를 조직하는 한편 뉴스 통신사도 사들여 추상표현주의의 우월함을 적극 홍보했다. 이와 동시에 바젤, 베를린, 밀라노, 파리, 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새로운 미국 회화전’을 대규모로 열었다. 이로써 미국은 실험예술과 진보적인 예술을 대변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애초부터 추상표현주의가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수성’ 때문이 아니라 뚜렷한 ‘정치성' 때문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격하며 “예술가의 미적 상상력은 이데올로기와 타협해서는 안 되며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면 이 말은 곧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기도 했던 셈이다.

예술은 정치 또는 권력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예술만을 존재해야 할 것 같지만 예술이란 게 또 웬만큼 배가 불러야 즐기고 누리고 가꿀 수 있는 것이다 보니 그 여유를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때로 권력의 시녀처럼 굴었던 예술의 진실을 폭로한다든가, 미술 작품 속 소수자들을 돌아본다는 기획과 의도는 무척 좋다. 그걸 잘 살리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전반적으로 소수자를 옹호하는 스토리텔링에 너무 빠진 나머지 트랜스젠더(이 책 표지에도 있는 릴리 엘베의 예시)까지 포용하는 포지션이 되었다는 것. 트랜스젠더는 소수자, 약자인 척하는 이들이 아닌지. 최소한 MTF는 그렇지 않나. 자신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제 여성의 삶이나 권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이 점은 많이 아쉬웠다. 심지어 저자는 ‘성 착취를 정당화한 ‘성 노동자’라는 말’이라는 꼭지에서 성노동 운운하는 말장난까지 비판했는데 말이다. 성 노동은 안 되는데 트랜스젠더는 된다는 것도 웃기지 않나. 어쨌든 그 부분은 비판적인 시선을 겸비한 상태로 읽고 넘어가면 다른 부분들은 다 괜찮다. 읽어 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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