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로빈 스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용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처음 만들어 낸 심리 치료사 로빈 스턴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치유법을 알려 주는 책이다.
이미 많은 분들이 가스라이팅에 대해 들어 대충은 알고 계실 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대신 내가 이 책에서 약간 충격을 받은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의 개정판 서문의 한 부분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가스라이팅에 공동 책임을 진다. 이것이 가스라이팅의 본질이다. 가스라이팅은 단순한 정서 학대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관계다. 나는 이것은 가스등 탱고(gaslight tango)라 부르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스라이팅이 가능하기 떄문이다. 물론 가해자가 상황이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피해자가 자신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가스라이팅의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피해자 역시 자신의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가해자가 봐주기를 바라고 그의 인정을 얻으려고 애쓴다. 또 가해자를 이상화하거나 그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요. '가해자와 피해자는 가스라이팅에 공동 책임을 진다.'고요?
나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가 나쁜 거지, 피해자는 죄가 없는 거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이 책 전반에서 저자도 절대로 피해자가 '그런 짓을 당해 싸다'라거나 '네가 그러니까 걔가 그러는 거지' 따위의, 피해자가 받는 고통을 피해자 본인이 유발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가스라이팅에 계속되는 데에는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워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위의 인용한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는 부분을 보여 드리겠다.
가스라이팅은 자신이 항상 옳다고 여기며 자존심을 세우고 힘을 과시하는 가해자 '가스라이터'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 '가스라이티(gaslightee)'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들의 인정이나 사랑, 관심, 보호 등을 받기 위해 가해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상대방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가스라이팅에 노출되기 쉽다. 그리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러한 취약점을 십분 활용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스라이팅하는 건, 자신의 힘을 상대방에게 가해서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이지만, 피해자가 그런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상대방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단호한 태도로 이를 거부하기 어렵다는 거다.
저자는 주로 네 명의 피해자를 예로 드는데, 여기에서는 그중 한 명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케이티는 원체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격이라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을 도와주는 일을 좋아하고, 또 자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 친구는 그녀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구는 것을 싫어한다.
그녀가 그럴 때마다 그 낯선 남자가 그녀를 유혹하려 했고, 그녀는 순진하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헤프게 굴었다는 식으로 불평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케이티가 자기 남자 친구가 자신을 따뜻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뭐라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냥 쿨하게 "그게 뭐 어때서. 난 모르는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아." 뭐 이런 말을 하고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티는 남자 친구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주기를 바랐고, 또 그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신경 썼다.
그래서 남자 친구가 자신의 (타인에 대한) 친절함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자신은 그에게 충실하고, 바람을 피우려는 게 아니었으며, 그 상대 남자는 결혼 반지까지 끼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 흑심을 가졌을 리 없다는 등 길게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가스라이팅에 대한 정신적 피해는 물론이고 말이다.
이 모든 게, 그녀가 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신 건강과 안녕보다 위에 놓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만약에 가스라이팅을 하는 상대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지인 중 한 명이었다면, 그래서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상대였다면 그런 불평을 끊고 벗어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런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뭐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도 그의 행동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극단적으로는 그와 헤어질 수도 있었을 거다.
저자는 이걸 이렇게 표현한다.
이들 세 사람이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면, 가해자는 가스라이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가해자들이 계속 형편없이 행동할 수도 있곘지만,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믿고 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때 가스라이팅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일단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원하기를 그만두고, 필요하다면 그 상대방과의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그렇게 해서라도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러고 싶다)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법이자 이 책의 핵심이다.
다행히도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쉽지는 않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자신이 이미 좋은 사람이고 유능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상대방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아 정체감을 가질 때, 우리는 자유를 향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가스라이팅을 외부에서 보면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가혹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관계는 항상 두 사람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스라이팅 상황에서 그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당신의 행동은 충분히 변화될 수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당신이 옳다는 주장을 그만두거나 상대방이 옳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가스라이팅을 끝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같은 것은 나중에 신경 쓸 세부 사항에 불과하고, 일단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려면 '필요하다면 이 사람과의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없이는, 가스라이팅을 중단시킬 수도, 자신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상대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다.
연인이나 가족, 친구와의 소중한 관계를 무조건 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중단하기 어려운 것도 잘 알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깨달아야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신은 남의 인정이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소중한 존재라는 걸.
가스라이팅을 겪고 있어서 이것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가스라이팅뿐 아니라 자신을 힘들게 하는 그 어떤 힘든 관계 속에 있으신 분이라면 꼭 읽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결국에 자유를 가져오는 변화는 자신이 제일 소중하다는 인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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