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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즈미야 간지, <뿔을 가지고 살 권리>

by Jaime Chung 2019.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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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즈미야 간지, <뿔을 가지고 살 권리>

 

 

정말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다.

제목의 '뿔'은, 병(육체적/정신적)이라든지 예민함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아픔이라든지, 어떤 것이든 남이 보기에 '비정상'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만한,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가리킨다.

'여는 글'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뿔'을 가지고 태어났다. 뿔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보여 주는 상징이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보물로, 태생적 자질을 말한다.
뿔은 두드러지기 마련이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그 뿔에 관심을 갖고 화제로 삼는다. 동물로서의 습성 때문일까? 집단에서는 뿔 때문에 꼬투리가 잡히거나 놀림을 당하는 등 주위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이 뿔이 있어 살기 고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것, 그 중심에는 뿔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증오하고 장애물로 생각해 감추며 살아가면 자연히 삶 자체가 빛바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살아갈 에너지가 고갈되어 더는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핵심이 온전히 전달되어 감동받고 있는데(이게 '여는 글'의 첫 세 문단이다), 심지어 그 뒤에는 더욱 더 멋진 부분이 따라나온다.

무려 저자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 동물원>을 인용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이라 저자의 이런 센스에 정말 반했다(아직 '여는 글' 두 페이지째인데 말이다!).

중에서 로라가 소중히 여기던 유니콘이 사고로 바닥에 떨어져 그만 '뿔'이 부러지고 만다. 그때 로라는 이렇게 말한다.
상관없어요. 아마도 신이 이런 식으로 축복을 내린 것인지 몰라요.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할래요. 뿔의 절단, 그 덕에 이 아이는 변종이라는 열등감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요. 앞으로는 뿔 없는 다른 말들과 좀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테네시 윌리엄스 <유리 동물원> 중에서
뿔이 잘린 사람들은 처음에 느꼈을 거북함도 잊고 어느새 자신이 '보통'이기를 바라고 주위 사람이나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가치관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자신의 뿔을 잘라내고 보통이 되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세뇌가 점차 확대되어 간다.

이런 상황에 의문을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갈 길을 잃고 사회 부적응이나 심신의 부조화를 일으켜 나 같은 정신과 의사를 찾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 '뿔'이야말로 자신을 자기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 뿔이야말로 자신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인용하며 옛날엔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렇게 쉽사리 '정상' 또는 '비정상'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의도이다.

우선 자신을 하나로 파악할 것, 스스로에게 '이상' 또는 '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지 말 것. 이런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보통'을 신봉하는 가치관을 대대손손 계승하려고 한다. 자신도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친다.

'보통'이라는 말에는 모두와 같은 게 좋다거나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할 게 틀림없다는 편중된 가치관이 들러붙어 있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에 '보통'은 없는데, 왜냐하면 '보통'이 아닌 것이 행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뿔을 지키기 위해서는 '평범' 또는 '보통'을 숭배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 책은 부제처럼 열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개중에 내가 제일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을 소개해 보자면 이런 부분을 들 수 있다.

강의를 하다 보면 가끔 '바람직한 육아 포인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마리아가 예수를 키웠듯이 키우는 것'이라고 답한다. 마리아는 신이 주신 아이를 잉태하고 낳아 키웠다. 결코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아에서는 이처럼 자기 자식을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같은 인식이 있다면 '자식을 위해서'라는 일방적인 강요를 하지 않게 되고, '대체 이 아이는 어떤 인간일까?'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심으로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사려 깊은 교류가 이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육아 전체가 부모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이런 방법이라면 정말 존중받고 자랐다고 느끼는 성인을 키워 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랑'과 '욕망'에 대한 6강에서는 바나나를 가지고 사랑과 욕망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알려 준다.

아주 더운 나라에 한 여행객이 도착했다. 그는 이 나라에 오기 전에는 바나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매우 더워 뭐든지 쉽게 썩었고 길에는 거지가 많았다. 그중에는 정말로 불쌍해 보이는 자도 있었다. 여행객은 거지에게 뭔가를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는 바나나 다섯 개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그는 세 개를 먹으면 배가 불러 만족했다. 하지만 바나나 두 개로 끼니를 해결하고, 나머지 세 개를 거지에게 주었다. 

그런데 거지는 바나나를 싫어하는지 고맙다는 말은커녕 그의 눈앞에서 '이런 것은 필요 없다'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여행객은 기분이 어땠을까? '기껏 내가 먹을 바나나까지 양보했더니, 그걸 던져 버려? 내가 너에게 다시 바나나를 주나 봐라!' 하고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여행객이 자기는 바나나 세 개를 먹고 거지에게 두 개를 줬으면 어땠을까? 어차피 그는 배가 찼고 나머지 두 개는 어차피 거지에게 주지 않아도 쉽게 썩으니, 그가 그걸 버리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바나나 한 개가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낳는다. 먹고 싶은 걸 참고 건넨 바나나 한 개는 '고마움'이라는 대가를 기대한 '위선의 바나나'가 되었다.

(...)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양보한 바나나 한 개에 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것은 동정심이다. 그 이면에는 '고마워하길 바라는' 기대나 '착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착한 일을 했다는 자기만족' 같은 것이 숨어 있다. 마치 착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 역시 욕망이다. 동정심의 내실은 예외 없이 이렇다.

'때마침 남은 것이니 버리느니 당신이 마음대로 사용하세요'라고 희사한다면? 이것은 기쁘게 버리는 행동이다. 이것이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짓 없는 '사랑'의 행위다.

인간으로서 성숙해져 욕망의 비율이 적어질수록 사랑에 사용하는 부분이 커진다. 바나나 하나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네 개를 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개를 원하면서도 억지로 참았을 때는 어딘가에서 생각하지 못한 '욕망'이 얼굴을 내민다. 이것이 위선이다. 테레사 수녀처럼 행동해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행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겉으로만 선인처럼 굴어도 안 된다. 마음과 행동이 같지 않으면 내실이 불순한 것으로 변하고 만다.

 

이렇게 '사랑'과 '욕망'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자에 대한 사랑, 태생적 기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자상 행위의 의미, 공황장애의 메시지, '병태 수준', 인간의 변화·성숙 단계에 대한 설명도 나오는데, 솔직히 쉽지 않다.

한 번 읽어서 될 것은 아닌 거 같고, 약간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으면 이해가 더 깊어져서 좋을 것 같다.

못난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으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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