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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시하라 가즈코, <참는 게 죽기보다 싫을 때 읽는 책>

by Jaime Chung 2019.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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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시하라 가즈코, <참는 게 죽기보다 싫을 때 읽는 책>

 

 

제목이 흥미로워서 도서관에서 빌렸다.

이시하라 가즈코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팔린, <도망치고 싶을 때 읽는 책>의 저자로, 이 책에서도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자는 철학을 전한다.

 

내가 제일 감명 깊었던 부분을 소개하자면, 이 부분이다.

그렇지만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상대를 위해 내가 바뀌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상대를 바꾸기 위해 나를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 부분에서 심장이 콕 찔렸다. 나는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를 조금 피곤하게 하고 희생하더라도 그걸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와 반대로 자기정심이 되어 자신이 느낀 감정과 오감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다.

예컨대,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에서 A라는 사람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B라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C는 상냥하게 웃으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이때 상대방의 말과 태도에 신경 쓰는 타자중심인 사람은 B씨에 대해 '저렇게 가만히 있다니, 뭔가 태도가 불량한 사람이다'라고 판단해 버리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나를 싫어하는군'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A와 C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분명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자기중심이 되어 자신이 느낀 감정과 오감에 초점을 맞춘다면, A씨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다고 느껴 특별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고, B씨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나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는 상태라고 느낄 수 있다. C는 말과 태도는 우호적이지만, 어딘지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우호적인 태도 뒤에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느끼는 방식에 오답은 없으며, 타자중심이 되어 상대의 표면적인 말만 믿으면 정보가 왜곡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소중히 하자는 것이다.

 

내가 저자의 이런 주장에 놀랐던 건, 저자가 지적하는 '의견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독단, 형식적인 신뢰 관계'의 설명에 약간 (또 다시) 심장이 찔렸기 때문이다.

친구나 이성, 애인이나 가족 간의 신뢰란 무엇일까요?

상대방에 관해 서로 모르는 점이 없고, 생각과 의견이 일치하며,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보다 공유하는 상태를 신뢰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상대가 나에 관해 속속들이 알아 주면 좋겠다. 나도 상대에 관해 전부 알고 싶다' 하고 바라며 상대의 마음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기를 원합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알아 주지 않으면 '나를 알아 줘, 이해해 줘' 하고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상대에게 요구하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무언가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 '이 사람은 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며 불신에 가득 찬 상태로 상대를 탐색합니다. 실제로 상대의 소지품까지 뒤지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려고 필사적일수록 상대를 더욱더 몰아세우게 됩니다.

상대의 소지품까지 뒤지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의심하며 극단적인 시나리오까지 창작했던 적은 많아서, 저자의 지적에 정말 급소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자의 이 말이 더 인상 깊게 다가왔다.

생각과 의견의 일치는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을 소중히 여긴 결과일 뿐 '의견을 일치시키자!'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보와 타협은 다르답니다. 

 

"타자중심인 사람은 감정보다 사고가 앞서기에, 매사를 곧장 사고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고를 인간관계를 한층 번거롭게 하는 주범입니다."라는 말도 내 문제의 핵심인 듯싶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를 '0 아니면 100', 즉 '전무 아니면 전부'라고 생각하므로, 상대방의 관계를 끊거나 혹은 유지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여긴다.

예컨대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자신이 피곤하거나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참고 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끊는다는 발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아니면 머리로는 알더라도 실제로는 두려워서 실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위에서 든 예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지금은 시간이 없지만, 이따가 저녁에는 괜찮아.", "20분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어.", "오후 7시 전에는 통화가 가능해." 같은 식으로 '어중간하게 거절'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일 통찰력 있는 말은 이거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정말 B는 책임감이 없어. 그럴싸한 말만 늘어놓고 제대로 실행한 적이 없다니까"라고 말하면, 그 직원을 바라보며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책임감이 없잖아. 항상 말뿐이고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있어?' 하고 마음속으로 부정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상대의 말을 마음속으로 부정하고 싶어진다면, 지금 자신이 듣기 싫은 것을 참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까지 이야기했을 듯 참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쳐 가면서까지 남을 위해 참으면, 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맞는 말이다. 자기 마음을 다쳐 가면서까지 남을 위해 참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대개 바람직하지도 않고, 정말 소중한 관계도 아닌데 말이다.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하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게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러려고 하고. 그래서 이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애당초 '내 주장을 내세우면 다투게 된다' 하는 생각은 억측입니다. 억측의 배경에는 '내 의견을 주장하려면, 상대와 싸워 이겨야 한다'라는 의식에 있습니다. 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기길 원한다면 싸움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또 두려워지지요.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하기 위해 굳이 남과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를 이기거나 제압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소중히 하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제목처럼,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을 때 한번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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