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앤드루 산텔라, <미루기의 천재들>
기가 막힌 제목이다. 부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인데, 나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 같은 사람들과 공통점(일을 미룬다)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안심도 되고 마음도 뿌듯해진다.
1장에 나오는 저자의 이 말이 일을 미루는 사람들의 태도를 아주 잘 보여 준다.
내가 미루기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게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그 이후 아주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는 사실은 똑똑히 기억한다. (...)
이 책을 쓸(사실대로 말하자면 안 쓸) 준비를 하면서 나는 미루기를 주제로 한 여러 문헌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그건 내가 부지런한 연구자여서라기보다는,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새로 치면 부리로 땅을 쪼는 일과 비슷하달까. 조사를 하면 할수록 같은 숫자가 몇 번이고 등장했다. 우리 중 20퍼센트는 만성적으로 할 일을 미룬다고 고백했다. 노동자는 하루의 노동시간 중 100분을 뭉그적거리며 보낸다. 이 주제에 관해 글을 쓴 연구자 다수가 스스로의 미루는 습관을 털어놓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미루기에 관한 학술 논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비유 가운데 하나는 연구 결과 작성을 미루는 자신에 대한 혐오다.
어떤가, 이런 저자라면 미루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어려운 글을 써야 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 타일 사이의 줄눈을 벅벅 닦"는 일이란다.
이런 저자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책을 읽으며 그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미루기를 유발하는 정신 상태에 대해서도 한 장을 할애하는데, 이건 직접 책에서 확인해 보시라.
그보다 내가 알려 드리고 싶은 건, 일을 미루는 사람들을 위한 수호성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4세기 아르메니아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말하는 까마귀를 만났다. 백부장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는데, 이 말 잘하는 까마귀는 뭐든 성급할 필요가 없다고 백부장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제안을 하나 했다. 개종을 미루라고, 서두르지 말라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 보라고.
하지만 백부장은 미루지 않았다. 신자로서의 새 삶을 즉시 시작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까마귀가 사실은 새의 모습으로 자신을 유혹하러 온 악마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백부장은(이 사람은 훗날 일 미루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인 성 엑스페디투스로 추앙받는다) 놀라운 행동을 한다. 백부장은 까마귀를 발로 짓밟아 죽여 버렸다.
정말 대단한 의지력 아닌가.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당장 실현했다는 게.
심지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신께 순결을 달라고 기도하며 "하지만 아직은 아니옵고"라고 했는데 말이다(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과연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수호성인으로 추대된 거겠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미루기를 거부한 이 성인이 여러 대륙에서 이미 숭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도양에 있는 자그마한 레위니옹 섬에서는 신자들이 길가에 성 엑스페디투스를 기리는 제단을 세워 화사한 빨간색으로 칠하고 자그마한 조각상으로 장식한다.
이 조각상에는 복잡한 규칙이 얽혀 있는데, 중보 기도 외에도 거래의 의미가 있다. 방식은 이렇다. 사람들은 길가에 제단을 세우고 작은 성인 조각상으로 장식해 성인을 기린다. 그다음 소원을 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경의를 표했는데도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면 작은 조각상의 목을 자르는 게 지역의 전통이다. 왜 레위니옹 섬에 머리 없는 성 엑스페디투스 조각상이 그렇게 많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호성인에게 기도를 하고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조각상의 목을 벤다니 거참 호쾌한 사람들이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루도비코에게 <그란 카발로(Gran Cavallo)>라 불리는 대형 청동상 제작을 의뢰받았지만, "레오나르도의 여러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기마상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이 작업은 무려 몇 년을 질질 끌었단다.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족하는 게 레오나르도의 기본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그의 머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지만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귀족들의 부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레오나르도는 여유가 있을 때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나서는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에게도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막대한 과제를 쉴 틈 없이 설정했고,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야심찬 투두 리스트를 만들었다. (...) 처음으로 레오나르도의 전기를 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완벽주의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는 많은 일을 벌였지만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구현할 완벽한 기술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레오나르도에게 실망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그 무엇도 끝내지 못할 것이다."
5장에서 설명되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간략히 말해 공장 노동자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도 흥미롭지만, 책 내용을 전부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미루기가 역사를 바꾼 에피소드 하나만 더 소개해 드리고 마무리할까 한다.
미국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우리가 아는 그 조지 워싱턴 맞다)은 사령관으로서 "새로 독립한 미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역시나 전세는 암담한 상태였다."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는 하도 쳐맞아서 너덜너덜한 상태였고, 살아남으려면 마지막 한 번의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달밤에 병사들과 작은 배를 타고 델라웨어강을 건넜고, 영국에 고용되어 트렌턴에 머물던 독일인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희망이 되살아났고, 워싱턴은 군 지휘자로서의 명예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는 그의 능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상대방의 게으름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실 워싱턴이 보다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독일군 지휘자였던 요한 랄(Johann Rall)의 불찰 덕분이었으니,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하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카드놀이를 하던 요한 랄은 영국을 응원하던 지역 주민이 워싱턴의 군대가 다가오는 걸 목격하고 이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 보낸 쪽지를 건네받았다. 하지만 카드놀이를 멈추고 싶지 않았던 그는 나중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메모를 펴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넣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미루기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겠어요?
여러분이 오늘 미룬 일이 당장 적들에게는 행운의 터닝포인트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일을 미루지 말고 해야 하는데, 어... 음... ´ _`...
뭔가 하고 싶은(또는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왠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미룰 때, 이는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일을 미룰 좋은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다 읽고 나서는 성 엑스페디투스에게 기도를 하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과 본인의 공통점(일을 미룬다)에서 위안을 받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일을 미루는 사람들의 모토는, (책에서 소개되는, '리히텐베르크 소사이어티'의 모토처럼) "내일이 더 낫다(Cras melior est)."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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