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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일개미 자서전>

by Jaime Chung 2019.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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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일개미 자서전>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오겠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갤리선의 노예처럼" 일하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직장 생활이 자신을 잡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 가슴속에 맺혀 있던 것들을 풀어내기 위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저자가 다녀 온 직장에서 있었던 웃기고 슬픈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제목의 '일개미'라는 단어는 저자의 소시민적인 삶과 (직장을 대하는) 자세를 아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기다. 저자의 말투도 재미난데, 그 상황이 너무나 공감되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 프롤로그 제목은 "85년생 일개미", 첫 꼭지의 제목은 "일개미로 태어나던 날"이다.

"일개미로 태어나던 날"은 저자가 첫 직장에 취업하기까지의 삶을 간단히 그린 후 첫 직장에 합격하기까지 노력을 담았는데, 심지어 시작부터 재미있다.

일개미의 씨가 따로 있을쏘냐.

나라고 일개미의 숙명을 타고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딱히 일개미로서의 자질이 엿보인 적도 없다. 일개미 탄생 설화에 걸맞을 에피소드라면 네 살 때부터 엄마를 도와 마늘을 깐 것,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개근상을 탄 것, 반장은커녕 돌아가면서 맡는 줄반장조차 하기 싫다고 읍소할 정도로 감투 공포증이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

이 꼭지의 마지막 문단도 기가 막히다.

엄마가 취업 축하 선물로 마련해 준 값비싼 정장을 빼입고 본사 사무실로 첫 출근한 날은 인간 나이로 스물네 번째 생일을 치른 닷새 뒤였다.

'인간 나이'와 '일개미' 나이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에서 저자가 얼마나 노련한 직장인인지를 알 수 있다.

아무렴, 사람의 영혼을 압박하는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의 소중한 '영혼'(본체)과 '몸'(직장인으로서의 페르소나)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지.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일개미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처럼.

 

취업 준비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소개서가 최악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저자도 "단언컨대 취업의 모든 단계 가운데 자기소개서 쓰는 일이 최고로 싫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노련한 일개미는 곧 자소서 작성법을 깨달았다. 

(...) 사실 나를 포장하기에 적당한 아이템을 골라 틀만 잘 짜놓으면, 업체 특성에 맞게 고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꼬마곰젤리를 팔았다. 번 돈으로는 MP3를 샀다.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경험에다가 솔솔 양념을 치면 된다. 만약 금융권이라면 내가 시식용 젤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했는지, 고로 나는 신뢰할 만한 인재임을 역설한다. 유통업체라면 내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은 소품을 준비해 동심을 공략함으로써 젊은 주부의 장바구니에 젤리를 담게 만들었다는, 즉 적극적인 마케팅 역량을 뽐낸다. 서비스업이라면 나의 붙임성 있는 성격과 살가운 미소가 잠재 고객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소개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지원서를 써대니 비굴함에 치를 떨 수밖에.

고된 취업 노동을 함께한 내 핑크색 노트북 취업 폴더에는 지금도 자소서 수백 개가 업종별로 완벽히 분류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에서는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예컨대, 이런 사소한 복수는 어떤가.

이대로라면 아나키스트라도 되었을 법하지만, 본디 스케일이 작은 인간인 나는 속으로 삭이던 분을 소소한 반항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를 들면 차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서는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섰다. 차장이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나한테 불만 있어요?" 물으면 "아니요" 하고 대답하고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단, 상무 앞에서는 여전히 공손했다. 가끔 깜박 잊은 양 슬리퍼를 신고 가 결재를 받긴 했지만. 한잔하자는 사수의 제안에 "싫습니다"라고 크게 외친 다음 내빼거나, 투피스 안에 블라우스 대신 캐릭터 셔츠를 받쳐 입거나, 이어폰을 꽂고 에미넴을 들으며 두 귀를 막는 등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반항들이 이어졌다. 이런 자잘한 분풀이는 당연히 어떤 개선이나 전복도 가져오지 못했다. 눈뜨면 어제가 내일이고 오늘이 글피 같은 서글픈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고 내 반항은 하나같이 나의 평판만 깎아내렸다.

그랬다. 스물다섯 때 나는 휘몰아치는 업무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퇴근길에 진지한 눈빛으로 "차장님, 소주 한잔 사주십시오" 하고 제안한 뒤 곱창전골집에라도 가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세련된 처세였을까? 부질없다. 그저 잠깐이나마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고 속 시원한 편이 낫지.

정말 너무나 내 마음 그대로다.

이게 딱 그 에피소드에 나오는 삽화다. 옆의 작은 일개미가 귀엽다.

 

'출판일개미'로 살아 온 저자답게 군데군데 책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나는 저자가 언급한 책은 모두 다 읽어 보고 싶어졌다. 특히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웃기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잠깐 보여 드리자면 이렇다. 앞의 내용은 대략, 저자가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실수로 책 앞표지에 오타를 냈다는 내용이다.

'안 되겠어. 파멸 버튼을 눌러야겠다.'

그렇다, 파멸 버튼이다. 첫 회사에서 쓴맛, 매운맛, 눈물 맛을 본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파멸 버튼이란 가상 장치가 들어 앉았다. 그걸 누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즉시 휴먼굴림체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뛰쳐나와 예금을 몽땅 인출해 여행을 즐기고 원 없이 놀다가 통장 잔고가 0원이 되는 동시에 파멸한다. 실제로 파멸을 감행한 적은 없지만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도 넘게 이 파멸 버튼에 손가락을 댔다가 뗐다. 기억을 더듬어 통계를 내 보자면, 파멸 버튼을 누르고픈 유혹이 가장 강렬히 타오르는 순간은 육체적으로 힘들 때보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때였다. 사고를 치고 처분을 기다리는 순간처럼 말이다.

한마디로 '다 X까' 하고 직장을 관두는 건데, 이런 상상을 해 본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책 중간중간에 분홍색 속지로 인쇄된 면들이 있는데, 삽화 또는 짤막한 글이 들어가 있는 페이지이다.

그중에 나는 "무와 쿠키"라는 제목의 글이 제일 마음에 든다. 글 자체는 직장 생활의 'X같음'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언급되는 실험 이야기만 놓고 보면 다이어트처럼 상당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일에는 거진 다 들어맞는다.

흥미로운 심리 실험이 있다. 학습 능력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두 그룹으로 나눈다. 그들을 한 방에 집어넣은 뒤 A 그룹에게는 쿠키를 주고, B 그룹에게는 무를 준다. A 그룹이 달콤한 쿠키를 첩첩 먹어 치우고 B 그룹이 아릿한 무를 꾸역꾸역 먹어 치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치우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낸다. 실험 결과는 어떨까? B 그룹이 A 그룹보다 훨씬 빨리 수학 문제 풀이를 포기했다. 왜일까? 심리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이미 맛없는 무를 억지로 먹는 데 그들이 가진 집중력과 끈기를 다 써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말마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옆에 끼고 하루 온종일 뒹구는 건 내가 유난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중에 회사에서 배터지게 먹어 치운 무를 소화하느라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아래 삽화에는 주인공 캐릭터가 눈물을 흘리며 쿠키를 먹는데, "무 맛밖에 안 나..."라고 생각하다가 쓰러져 버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바로 밑에는 또 일곱 개의 칸 중 앞의 다섯 개는 '무요일', 뒤의 두 개는 '쿠키요일'이라고 쓰여 있다.

이 무요일과 쿠키요일의 반복이 우리 삶이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아, 책의 군데군데 삽입되어 있는 '일개미' 삽화가 참 귀여워서 이 책에 매력을 더한다.

주인공(저자) 캐릭터가 일개미처럼 더듬이를 달고 있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ㅋㅋㅋㅋ

 

일개미의 탄생!

 

이 에세이는 '일개미의 탄생'에서 취업, 퇴사, 이직 등의 과정을 착실히 거쳐 나중에는 이 일개미가 노조에서 (얼떨결에) 한 자리를 맡게 되고, 회사에 복수도 할 겸 회사의 숨겨진 복지 제도를 찾아 자기 개발을 해 나가게 된다는, 나름대로의 기승전결도 갖췄다.

책 마지막에는 책 중간에 나오는 '일개미 프렌즈' 중 한 명인 일개미 친구의 추천사도 붙어 있는데, 과연 일개미들이 서로에게 주는 위안이라고 할까, 일개미들의 연대라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개미들로 태어난 게 내 죄도 아니고, 그저 일개미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면서도 인간성을 잊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고 또 힘을 주는 모습, 정말 딱 나와 내 친구 같아서 공감됐다.

소시민, 직장인의 우환을 다루면서도 유쾌하고 웃을 수 있는 에세이를 찾으신다면 이게 딱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글솜씨가 홀딱 반해서, 이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볼 생각이다. 강력 추천!

 

(참고로, 이와 비슷한 책으로는 <삼우실>도 좋았다. 아래 리뷰를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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