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송해나,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출간되었을 때부터 읽고 싶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이제야 읽게 됐다.
이걸 읽고 나니, 청소년까지는 아니어도 성인 권장 도서 목록에 이걸 추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직감한 3주차부터 출산 때까지, '임신 일기'라는 트위터 계정에 자신의 임신 과정을 꼬박꼬박 기록했다.
비록 모든 임산부들이 같은 임신 증세나 경험을 겪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임신 일기'에 쓰인 저자의 경험만큼은 거짓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임산부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주 단적으로 잘 보여 준다고는 할 수 있겠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 그리고 오늘, 아주 희미하게 테스트기에 붉은 두 줄의 선이 보였다. 임신이다. 계획적으로 임신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줄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됐다.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지금부터 나는 걸어다니는 걱정덩어리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자위하는 꿈을 꾸다가 복통에 깨서 이렇게 썼다.
자위하는 꿈을 꾸다가 극심한 복통에 잠에서 깼다. 섹스를 한 것도 아니고, 자위를 한 것도 아니고, 자위하는 꿈만으로도 너무 아파 서럽다. 뭐 이렇게 아픈 복통이 다 있지? 자궁이 수축한 걸까? 자궁이 수축했다면 간신히 착상해서 분열하고 있을 아기에겐 온 세계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 아닐까? 아기는 안전한 걸까?
오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엄마 욕정에 놀랐을 배 속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려고 해서 욕이 나와 버렸다. 임신 전에는 배 속 아기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뇌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그러니까 감정도, 생각도, 무엇도 없는 세포덩어리에 '아기'라는 인격을 부여하고 내 행동 하나하나에 미안함을 느끼다니.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늘 자부했던 내 존재가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다.
책을 읽어 나가면 저자가 (본인 표현대로) 상당히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페미니스트임을 느낄 수 있는데(임신 일기라고 하면 기대할 만한 '아기를 가지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어서 아기를 만나 보고 싶다' 따위의 감상적인 표현이 전혀 안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벌써부터 이렇게 얼굴조차 보지 못한 존재에게 '아기'라는 인격을 부여해 자신이 '나쁜 엄마'가 아닌가 자괴감을 느낀다는 데서 충격을 받았다.
아마 오랫동안 사회에서 주입받은 모성애 교육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저자는 남편과 상의 후 분명 자신의 의지로 아이를 가진 것인데도, 임신이 이렇게 고통하고 비참한 것인 줄 몰랐다는 말을 책 내에서 자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성교육 시간에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을 하면 임신이 된다는 정도만 가르쳐 주지, 여성이 임신을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지나고 어떤 경험을 하는지는 절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나는 이게, 만약 여자들이 이런 것을 안다면 출생률(이 책에서는 '출산률' 대신에 '출생률'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출산률'이라는 단어가 아이를 '낳는' 것의 책임을 순전히 여성의 책임으로만 돌린다는 어감이기 때문이다)이 낮아질 것을 우려해서 그런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아마 맞을 거다.
그만큼 임신 과정은 괴롭고 힘들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든지는 이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내가 특히 충격받은 것들 위주로 몇 가지 인용해서 알려 드리겠다.
4주 차: 남편은 며칠째 출장 중이고, 나는 어젯밤 꿈에서 남편과 섹스를 하다가 배가 너무 아파 잠에서 깼다. 자궁이 혼자 설레발치고 수축했나 보다. 뭐야, 나 앞으로 9개월 동안 섹스도 못 해? 섹스로 시작된 임신이 결국 섹스의 무덤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몸소 겪고 있다. 임신호르몬 때문에 생전 없던 야한 꿈들을 종종 꾸고 있지만, 초기 임산부에게 자위와 섹스는 곧 자궁수축이고, 자궁수축은 쾌감이 아니라 극한 통증이다.
4주면 임신 극초기인데, 이때부터 성적 쾌감은 꿈도 못 꾸고 자궁이 수축하면 통증을 느끼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10개월을 버틴다는 거지?
7주 차: 요즘은 잠들기 전, 남편과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임신 중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밤이 너무 괴롭다. 밤 열 시가 넘어가면 속 쓰림과 메슥거림이 치솟아 구토로 뱉어내지 않고선 못 견디겠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온종일 긴장하며 참았던 입덧의 괴로움이 마구 활개를 친다. 토하면 위산 때문에 식도가 작살나지만 속은 잠시 편해지기에, 일단 지금 내가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구토하는 쪽을 택한다. 구토조차 하지 못하면 그날 밤은 정말 죽고 싶은 밤이 된다.
나는 임신 초기 구토가 이렇게 심한 줄도 몰랐다. 물론 입덧이라는 게 사람따라 다르긴 한데, 낙태를 생각할 정도로 괴로운 건 줄은 몰랐다. 이게 다 드라마에서 입덧을 그냥 '우욱' 하는 정도로 가볍게 묘사한 탓이다(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임신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이 없으니까!).
8주차: 임신 전에는 스쿼트, 런지, 플랭크 등의 운동을 꾸준히 했다. 몸이 약해 근육을 유지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임신 후로는 그놈의 '유산 위험' 때문에 가벼운 스트레칭도 하지 말라더라.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나려면 내 근육이 더 필요할 텐데, 아기를 살리느라 나를 죽여야 한다니 앞길이 캄캄하다.
'순산'하려면 임신 후기에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요가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하는데 특히 허벅지와 코어 근육을 키워야 한단다. 이미 임신 초기부터 다 망해 버린 몸인데 그때 무슨 수로 운동을 시작하고 근육을 키운담. '자연 분만' 못 하면 또 산모 탓하겠지. 임신과 출산은 모순 자체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 때문에 가벼운 스트레칭조차 금지당한다고? 그러다가 임신 후기에 어떻게 운동을 하란 말인지? 그때 되면 또 그 시기에 맞는 고통이 따라올 텐데?
정말이지, 아기를 잘 키우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생명을 유지하게 돌보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애초에 그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산이 되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왜 애라는 건 그냥 수정이 되면 별 위험 없이 알아서 잘 자라는(물론 제 어미의 몸에서 양분을 쪽쪽 빨아 먹고 어미를 힘들게 하면서)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정말 '살아 있게만' 하는 것도 극히 까다로운 존재인데 말이다.
이렇게 임신 자체도 힘든데(위에는 임신 초기 증상만 인용했지만, 책에는 출산 때까지 저자가 겪은 다양한 증세들이 잘 묘사돼 있다), 더 거지 같은 건 형편없는 법 제도와 사람들의 인식이다.
저자가 책 내에서 여러 번 지적하는대로, 우리나라 시스템은 너무 부실하다. 육아 휴직을 이용할 수 있는 직장도 많지 않은데, 만약 육아 휴직 사용을 허가받는다 해도, 법정 육아 휴직 기간은 1년뿐이다.
이 1년을 출산 전과 후에 나눠 써야 하는데, 산전에 육아 휴직을 쓰게 되면 산후에는 그만큼 쓸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들게 된다.
육아 휴직 급여도 휴직 전 수령했던 임금의 50퍼센트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상한액이 있어서 육아 휴직 3개월부터는 월 150만 원, 4개월째부터는 월 120만 원이다.
또한 육아 휴직자의 대체 근무자를 따로 채용하지 않는 기업들도 있어서, 이런 경우에 임신한 여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막달까지 일하거나, 아니면 퇴사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 저자의 말대로, "이쯤 되면 여성에게 임신을 하라는 건지, 임신한 여성에게 직장을 다니라는 건지, 도대체 뭐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기업들은 이익 추구를 위해 정말 딱 법만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그리고 그나마도 어길 수 있으면 어기려고 하는 기업도 많다), 임산부를 보호하고 임산부의 건강과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법 제도를 탄탄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이 임산부를 배려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법으로 대체 근무자를 채용하라고, 임산부가 일 걱정 없이 자기 몸(과 아기)을 돌볼 수 있도록 하라고 강제하지 않으면, 기업이 먼저 나서서 그렇게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인식 수준에?
임산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정말 봐주기 힘들 정도다. 저자는 출퇴근 길에 지하철 임산부 배려 좌석에 앉지 못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 좌석이 비어 있는 경우도 없고, 저자가 임산부 배려 배지를 달고 있어도, 배가 남산만큼 나와도 먼저 비켜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일단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가 임산부가 보이면 비켜 주겠다고 하는데, 초기에는 외형으로 임신했는지 안 했는지 판별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임산부를 봐도 비켜 주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임산부의 배에 왜 그렇게들 덥썩덥썩 손을 올려 대는지, 저자도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다가 나중에 배가 커지자 몸을 돌려 피하기도 힘들어 어쩔 수 없이 당하고 만다. 임산부의 몸은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좋은 것인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임산부를 봐도 그 배를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모르는 사람 배를 만지는 게 엄청난 실례라는 걸 모르는 걸까?
게다가 임산부만 보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 분만'을 해야 한다 주장하고(저자는 '질식 분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때의 질식은 숨이 막혀 죽겠단 뜻이 아니고 '질'을 통해 분만을 한다는 뜻이다), 임산부가 아프다, 힘들다 하면 임신하면 원래 그런 거니까 유난 떨지 말라는 둥 아주 제멋대로 이야기하기 바쁘다.
책 제목처럼, 임산부는 그저 "아기 캐리어"에 불과하단 말인가? 저자가 기록한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렇게까지 무례하고 무지할 수가 있다니!
저자 말대로, "임신 관련 지식이 없으면 임산부에 대한 존중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걸 개인의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대대적으로 임산부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배려할 수 있도록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공익 광고 등을 통해)을 강화하고, 캠페인도 활발하게 벌여야 한다.
무엇보다, 임신을 여성의 일로만 보는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 그러려면 전반적으로 여성혐오적인 사회 분위기부터 뜯어고쳐야 할 판이니,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저자가 출생 신고 때 아이에게 남긴 말처럼,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저자를 비롯한 용감한 여성들의 움직임에 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저출생 웅앵웅 하는 현대 시대에 양성이 모두 필히 읽어야 할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책을 전 국민 필독서로 지정하거나 옛날 MBC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읽기 캠페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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