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리베카 솔닛,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출간될 때부터 인기가 있었던 책이라, 나는 도서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이번에야 드디어 빌려 읽었다.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라서 굳이 설명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이 글은 저자가 쓴 11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데, 모두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마음에 든 꼭지들 위주로 안내하고자 한다.
책의 첫 번째 꼭지이자 제일 길이가 긴 <침묵의 짧은 역사>는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이런 인용문으로 시작된다.
가장 후회했던 것은 내 침묵이다. (...) 그리고 세상에는 깨어져야 할 침묵들이 너무나 많다.
그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들, 특히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이제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내용인데, 나는 이 부분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 이야기와 대화는 그 뿌리와 같다.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이 스트레스와 위험에 대처하는 반응은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0년 UCLA의 심리학자들은 그런 연구가 대체로 수컷 쥐와 인간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여성을 연구했고, 자주 채택되는 세 번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것은 여럿이 한데 뭉쳐서 연대와 지지와 조언을 나누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행동 면에서 암컷들의 반응은 '살피고 돕는' 패턴이 좀더 뚜렷했다. 살피는 행동이란 자긴과 자식을 보호하는 유익한 활동으로 안전을 증진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을 말한다. 돕는 행동이란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사회관계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활동은 말을 통해서,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경청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살피고 돕는 사람들의 반응에 담긴 연민과 이해를 느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자들보다 더 일상적으로 하는 듯하다. 이것으 내가 대처하는 방식이다. 아니, 내가 대처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나를 돕는 방식이다. 이제 내게는 그런 공동체가 있으니까.
"맞서거나 도망치거나(fight or flight)"는 정말 오만 군데에 다 인용되는 이론이라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것조차 수컷/남성들 위주로 연구해 도출된 결과라고?
정말이지... 환멸감이 들었다. 뭐야, 그럼 남자들의 행동 방식이 모든 인류의 기준이라는 거야?
어쩐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별로 공감이 안 되더라.
왜 보통 흔하게 하는 말들이 있지 않나. 여자들이 예컨대 "오늘 내 상사가 나한테 뭐라 그랬는지 알아?" 하고 불만을 터뜨리면, 남자들은 그걸 고민 상담으로 받아들여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고, 같은 여자들은 공감을 원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서 같이 이야기에 공감하고 반응해 준다는 것 말이다.
분명히 그런 식으로 어떤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며/공감받으며 이 일을 견디고 극복해 나가는 방법이 있는데, 어쩜 그 당연하고 단순한 것을 그 많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보지 못했던 걸까? 남성 위주의 사고에 갇혀 있어서 그랬겠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즉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참가하고, 동읳거나 반대하고, 살며 참여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는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이는 모두 피해자에게는 아무 권리도 가치도 없으며 피해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행동이다. 여성을 침묵시키는 행위는 좀더 사소한 방식으로도 벌어진다. 어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 끈덕진 괴롭힘을 겪다가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 중에 상대가 끼어들거나 말을 가로채는 일을 겪으며, 얕보이거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한다. 목소리를 갖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인권의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권리와 그 결핍의 역사를 침묵과 그 침묵을 깨는 일의 역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버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난 이 부분도 흥미로웠다. 사실 이 부분은 주석이긴 한데, 생각해 볼 거리를 제시한다.
문화역사학자 조엘 디너스타인(Joel Dinerstein)이 '아메리칸 쿨' 프로젝트차 조사할 때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에게 왜 목록에 여자가 그렇게 적으냐고 물었는데, 묻자마자 스스로 답을 깨달았다. 남성적 쿨함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는 태도, 즉 상대에게 먼저 손을 내밀거나 반응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만일 여자가 취한다면 긴장증의 징후라거나 용납할 수 없는 오만함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하면 쿨한 것이 여자가 하면 차가운 것이 된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남성에게도 인간성, 그중에서도 특히 감성(감정)을 빼앗는다.
'남자다운 남자'는 남의 감정에 이입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몰라야 한다.
주류 이성애 문화에서 여성은 남들을 위해 대신 감정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노동을 수행해왔다. 내가 어릴 때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친구의 아버지는 그때 우리를 배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락해라. 네 엄마가 걱정할 테니까." 어머니는 아버지가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대신 맡는 역할이었다. 어머니는 인정해도 좋은 감정들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수다로 가정의 침묵을 메우는 사람, 그럼으로써 가족들을 하나로 이으려고 애쓰는 사람, 그리고 착하지만 과묵한 남자들, 나쁜 점이라고는 기껏 감정 표현을 거북하게 느끼며 소통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점잖은 남자들이 가득한 집에서 유일하게 열린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책인지 영화인지(아마 영화였을 것이다)에서 봤던 말이 떠오른다. 영화에 여자 주인공이 있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말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과묵한, '남자다운 남자'인 남자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이 이 과업을 떠맡고 또 이 길을 가게 되었는지 설명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남자가 울거나 웃거나 분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면 너무 '게이'스러운 거 아니야?
그래서 여자 주인공이 필요한 거다. 극 진행에 필요한 이런저런 상황(예컨대 그는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같은)을 설명해야 하는데, 남자가 자기 입으로 나불나불 떠들 수 없으니까, 여자가 물어보고 남자가 답해 주게 만든다.
여자들은 또한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해 남자들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여자 캐릭터가 없었으면 영화는 애초에 진행이 안 됐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딱 그 정도 역할만 맡는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절대 되지 못하고, 그냥 남자 주인공을 이런저런 식으로 보조하는 역할.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아래 문단도 인상 깊어서 여기에 옮겨 둔다.
그리스 고전 속 사제 테이레시아스는 원래 남자였으나 벌을 받아서 여자로 변신했고, 여자로 7년을 살다가 도로 남자로 변신했다. 신들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가 생겼을 때 테이레시아스를 증인으로 불러서 당사자의 체험을 들었다. 우리 시대에는 트렌스젠더가 그런 전문가 증인이다. 젠더 역할이 어떻게 강요되고 재강요되는지를 증언해줄 증인이다. 벌써 십 년도 전에 스탠퍼드 댛가 생물학자 벤 바레스(Ben Barres)는 그런 증언으로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그의 옛 이름은 바버라 바레스(Barbara Barres)다. 그는 2006년 <네이처>에 실은 글에서 자신이 과학계에서 여성으로 겪었던 편견을 소개했다. 자신보다 자격이 부족한 남자 후보들에게 교수 임용에서 밀렸던 일, 남자친구가 수학을 도와줬나보군요 하는 말을 들었던 일. 남자로 성전환한 바레스에게 당신이 누이보다 똑똑하다고 말한 남자도 있었는데, 그 남자는 여자였던 과거의 바레스를 그의 누이로 착각한 거였다. 바레스도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남자가 되어 이런 일들이 뚝 그치고서야 알아차렸다고 했다.
<500만년 된 교외에서 탈출하기>도 신선한 꼭지이다.
이 꼭지는 우리가 흔히 듣는, '원시시대에 남자들은 사냥을 하러 나갔고, 여자들은 아이를 기르며 집에서 머물렀다'는 식의 '썰'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 나는 이런 이야기를 500만년 된 교외의 이야기라고 여긴다. 원시 인간 남자들은 늘 나갔다고 한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남자들 중에는 늙었거나 아프거나 아니면 그냥 빈둥거리면서 지난주 잡았던 환상적인 영양에 대해 잡담이나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으니까. 남자들은 원시 출퇴근 기록계를 성실히 찍으며 창과 아틀라틀을 들고 매일, 종일 나갔다. 그동안 여자들은 난롯가에서 아이들과 어슬렁거리며 남자들이 베이컨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여자를 먹였다. 여자는 남자의 유전자를 퍼뜨렸다. 훗날 여성 인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런 이야기는 여성의 정조와 남성의 힘을 몹시 걱정했다. 그래서 왜 여자들은 정숙하고 남자들은 강한지 설명하는 가설을 덧붙임으로써 걱정을 달랬다. 정조를 고깃덩이와 교환했다는 것이었다.
이 '500만년 된 교외의 이야기'에 취한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해부학자 C. 오언 러브조이(C. Owen Lovejoy)는 인간 보행 능력의 진화에 관한 논물에서 이렇게 썼다.
"새로운 번식 체계에는 이족 보행이 관련되어 있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덕분에 남자가 멀리서 모은 음씩을 짝에게 가져다 나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씨구. 남자들만 걸을 줄 알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럼 뭐 그 시대 여자들은 기어다녔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모순되는 증거는 많다. 저자는 1950년대에 산족이라고도 불리는 칼라하리 사막 사람들과 함께 산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Elizabeth Marshall Thomas)의 연구 결과를 설명한다(참고로 산족은 아주 최근까지도 지구의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원시적인 생활양식을 지키며 살았다고 여겨진다).
산족은 온 집단이 정기적으로 이동했고, 가족들이 집단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토머스가 만난 여자들은 거의 매일 나가서 먹을 것을 채집했다. 너무 커서 업고 다닐 수 없거나 너무 어려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은 야영지에 남은 사람이 대신 보살폈고, 그동안 엄마들은 돌아다녔다. 토머스는 사냥과 채집이 완전히 분리된 활동이 아니란 걸 똑똑히 보여 주었고, "느린 사냥감 거북, 뱀, 달팽이, 새끼 새는 채집하던 사람들이 자주 발견하곤 했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식량의 독점점 공급자가 아닐뿐더러 고기의 독점적 공급자도 아니었다. 남자들이 집에 고기를 가져오지 않았다거나 남자들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두가, 아이들까지도 식량을 구해왔다는 뜻이다.
굳이 이런 인류학자의 말을 가져오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자들만이 식량을 구해 왔고, 여자들은 상당히 의존적이었다'라는 가설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 수 있다.
식량이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던 시절에, 인류의 절반쯤 되는 여성들을 놀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한,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나서서 식량을 찾아도 될까 말까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꼭지를 읽어서 이런 '500만년 된 교외의 이야기'의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읽어 볼 가치가 있는 꼭지다.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도 아주 흥미로운 꼭지였다. 이 글에서 저자는 <에스콰이어>가 작성한 추천 도서 목록이 남성 위주라는 점을 맹렬히 비판한다.
(...) 온라인 잡지 <n+1>의 편집자 데이나 토르토리치(Dayna Tortorici)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을 읽다가 화자가 못생긴 여자들의 다리가 얼마나 굵은지 묘사하는 대목에서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평생 못 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동일시하려고 애쓰는 책이 나를 거부한다고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다. 나는 결국 충격을 받아들였지만, 그 경험 때문에 자연히 내 몸이나 그 밖의 것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작가 에밀리 굴드(Emily Gould)는 솔 벨로, 필립 로스, 존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를 "20세기 중반 여성혐오자들"이라고 명명했는데, <에스콰이어> 목록에 올랐고 내 목록에도 오를 네 남자 작가를 지칭하기에 딱 알맞고 편리한 별명이 아닐 수 없다.
나도 그 유명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그 소위 '자유로운 영혼'인 조르바가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는 어느 독자의 후기를 보고서는 그 책을 읽을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세의 구속에서 다 벗어난 듯 자유로운 삶을 살고 또 그런 점으로 독자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인물이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한다니, 그러면 '자유로운 삶'은 오직 남자들만이 살 수 있다는 뜻인가?
저자가 이 꼭지에서 지적하듯이, 나도 물론 <모비 딕>을 정말 사랑하고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여성 인물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정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도 문학과 감정 이입, 그리고 젠더에 관해 논하는 훌륭한 글이다.
문학이란 무릇 다른 사람의 입장에 이입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 준다는 주장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은 다른 이들(예컨대 여성이나 다른 인종, 동성애자)에게 이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여자가 <롤리타>를 읽고 이것은 험버트 험버트가 불쌍한 소녀 롤리타를 강간하는 이야기라고 말하며, 자신은 롤리타에게 이입했고, 롤리타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할 기회도 갖지 못했던(왜냐하면 <롤리타>라는 소설 자체가 가해자 험버트의 입장에서 서술되니까) 이중의 피해자라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여자가 예민하다느니, 소설은 소설로 받아들이자느니 하며 성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진짜로 농담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시는지? 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세상을 나쁘게 비추는 농담은 받아들일 줄을 모르고, 그때 그들이 화내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받아들일 줄을 모르고, 그때 그들이 화내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보자면 그들은 사사건건 제 뜻대로만 하고 싶어 하고 자기가 멋지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
이건 그레이슨 페리가 <남자는 불편해>에서 '디폴트 맨(Default Man)'이라는 말로 정의한 개념과 비슷하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이 세상의 '기준, 디폴트'이기에,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의 처지에 이입해 그들은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하는지 공감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책도 써내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가 이 꼭지의 말미에 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우리가 <롤리타>를 읽지 말아야 한다고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나도 그 소설을 한 번 이상 읽었다. 나는 그저 문학의 정전으로 추어올려지는 작품들 중 적잖은 수가 내 젠더를 꽤나 심술궃게 다루고 있으니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들의 목록도 한번 작성해 보면 좋겠다고 농담했고,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 "물론 나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책을 뭐든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볼 때 어떤 책들은 독자에게 여자란 쓰레기라고, 혹은 액세서리로 존재할 뿐 그밖에는 없다시피 한 존재라고, 혹은 천성적으로 못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가르치는 지침이다.
책 내에서 인용되는,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Muriel Rukeyser)의 시구처럼,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이 책이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도록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참고로,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인 <여자들은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가리키는 질문이란, '애는 왜 안 낳았나요? 언제쯤 낳을 생각인가요?' 같은, 여성과 모성성을 동의어쯤으로 여기는 개념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말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들어가며' 이후에 나오는 짧은 글, <모든 질문의 어머니>라는 꼭지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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