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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먼지, <책갈피의 기분>

by Jaime Chung 2019.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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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먼지, <책갈피의 기분>

 

 

먼저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으로 시작하자. 이 책은 단연코 올해 내가 읽은 책들 중 상위권에 랭크시킬 만하다.

내가 얼마 전에 읽은, 구달의 <일개미 자서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웃기다.

2019/10/04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일개미 자서전>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일개미 자서전>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일개미 자서전>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오겠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갤리선의 노예처럼" 일하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직장 생활이 자신을 잡아 먹지 않도록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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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책을 다 읽은 후 리뷰를 쓰려고 책 뒷표지를 봤더니 그제서야 구달 님이 이 책에 쓴 추천사를 발견했다. 세상에, 책을 다 읽는 동안 뒷표지를 한 번도 안 보는 게 가능한가? 그렇다, 그게 나다).

일단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책갈피의 기분, 책갈피의 기분이란 게 뭘까?' 하고 흥미를 느껴서 책을 빌렸는데 책 중반쯤에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이 나와 있었다.

책을 만들며 이 책 저 책 사이에서 치이고, 결국 너덜너덜 납작해져 버린 그날, 나는 책갈피의 기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빈첸이 내 기분을 물어봐주지 않았다면 이 책의 제목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기왕 책갈피로 살아야 한다면 가급적 납작해지는 것이 좋겠지. 편집자의 삶이란 어차피 책 안에 담겨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 저자는 <일개미 자서전>의 구달 님과 마찬가지로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나도 책을 좋아하고 한때는 편집자가 될까 생각도 해 보았기에(그렇지만 인간을 직접적으로 대하는 일이 너무 많아 불편해서  나에겐 맞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편집자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저자가 편집자라는 일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한 1년쯤은 편집자로 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자가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하고 작가를 꿈꾸어서 그런가, 글솜씨가 정말 상당하다.

1부 제목은 "나는 12구짜리 멀티탭입니다"인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만큼 편집자가 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편집자가 디자이너, 교정자, 마케터, 인쇄소와 제본소, 언론사, 방송국 등등과 작업을 하며 그 사이사이에서 의사소통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거의 멀티탭 수준이다. 그것도 한 12구짜리."

이 기가 막힌 표현을 읽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이런 표현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저자는 "편집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꼭 그래야겠대?"라고 대답한단다.

본인이 꼭 그래야겠다고 한다면 곧 시들시들 말라갈 새싹을 위해 잠시 묵념한 뒤 "구인 중인 출판사에 이력서를 넣으면 돼."라고 매우 심플한 답변을 해 준다. 너무 성의 없나? 하지만 이게 팩트인걸.

조금 더 진지하게 답변하자면, '북에디터'라는 사이트에서 구인구직 게시판을 확인해 보면 된다.

또한 저자의 팁에 따르면 편집자로 지원할 때 전공이나 스펙은 크게 상관없는 것 같다고 한다.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한 출판마케터나 동양화를 전공한 편집자" 등도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또한 "무작정 들이밀기 두렵다면 한겨레 출판편집학교나 SBI 서울출판예비학교 같은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라.

 

편집자란 물론 매력적인 직업이고, 그 직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나는 저자가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어떻게 그 일을 관두지 않고 열심히 편집을 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으니까. 

"지긋지긋한 책태기"라는 꼭지에 소개되는 저자의 일화만 봐도 저자가 책에 얼만큼 큰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저자는 '책태기', 즉 책이라면 모든 게 지긋지긋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원인은, 부서 이동으로 어린이 학습 시리즈를 담당하게 된 것인데, 이미 있는 시리즈를 계속 추가하는 작업이었기에 비교적 어려운 업무가 없었다.

새로운 기획도 할 필요가 없고, 표지도 같은 스타일로 소제목만 바꾸면 되어서 디자인에 대해 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일이 쉬워지니 자연스레 야근이 줄었고 스트레스도 줄었다. 퇴근이 빨라지니 그동안 미루던 친구들과의 만남도 가질 수 있었고, 평일 야간 데이트도 즐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행복하긴 한데 괜히 회사에 가기가 싫었다. 나는 정말 야박한 액수의 돈을 받으면서도 야심한 밤까지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업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출근길이 상쾌하지 않은 것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 만드는 게 지루했다. (...)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결국 저자는 이런 지루하고 쉬운 일을 견디지 못해 이직을 선택하게 된다. 세상에, 나 같으면 너무 편하다고 좋아했을 텐데. 어떤 사람들에겐 '힘들어도 보람 있는 일' 같은 게 공허한 정신 승리의 말이 아니라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굳이 편집자가 아니라도 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손가락 힘을 주체 못 한 나머지 0을 하나 더 누르는 바람에 2006년이 어마어마하게 먼 미래로 둔갑을 한다거나, 저자명 '김먼지'가 1mm도 안 되는 작대기 하나 때문에 '김민지'로 바뀐다거나, 본문에 등장하는 '불어'를 일괄 '프랑스어'로 바꿨더니 글쎄 "이웃과 더프랑스어 살았다."라는 글로벌한 문장이 탄생하기도 한다. (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사실 이 책과 위에서 언급한 구달 님의 <일개미 자서전>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원래는 독립 출판된 책이지만 우연히 한 편집자에 의해 발굴되어 대중적으로 출판되었다는 것. 정말 놀랍다. 

과연, 재미있는 글, 잘 쓴 글,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글은 오래 살아남게 마련이구나, 싶었다.

저자는 이 책을 퇴근 후에, 남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신이 나서 썼다고 하는데, 당시 일하던 곳의 근무 상황이 힘들어도 관둘 수가 없었단다.

왜냐하면 오늘 에피소드가 하나 생기고 내일 또 두 개 생기는 식이었으니까. 글 쓸 거리가 매일 생겨나니 어떻게 이 좋은 글의 원천을 관둘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한동안 "낮에는 편집자, 밤에는 작가"로 살았다.

명분이 없었을 뿐, 나는 할 말이 정말 많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업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행한 것들을 그저 줄줄이 풀어내기만 하면 글이 되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을 더듬어야 할 줄 알았는데, 사건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출퇴근길 지하철이나 회사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글감들을 메모장에 적어 두고, 퇴근 후나 주말에 그 소재들을 모아 글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어쩌면 나는 글이 너무나도 쓰고 싶었던 걸까. 손에 재봉틀이라도 단 것처럼 타닥타닥,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며칠 만에 100페이지가량의 원고가 모였다. 출력해서 보니 꽤 그럴듯했다.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당장에라도 근사한 책 한 권이 나올 것만 같아 어서 예정된 분량을 채우고 싶었다. 온종일 내 글 생각만 하느라 일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글을 쓰고 싶다는 두근두근한 마음이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싶어 했다니! 그건 저자가 그만큼 편집자란 일에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만약에 내가 견디기 힘들어서 그만뒀던, 그렇지만 사실 내가 좋아했던 그 일을 하던 그때, 나도 이렇게 글을 썼다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

 

아, 맞다. 저자 이름이 왜 '김먼지'냐면, 나도 처음엔 이 책에 치이고, 저 작가와 요 디자이너, 그 인쇄소 사장님 등에 치이는 편집자로서의 어떤 존재감이랄지, 권위랄지, 하는 것들이 '먼지'에 수렴해서 자조적인 의미에서 '김먼지'라는 필명을 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저자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이름을 빌려 온 거라고. 책 잘 팔리면 간식 사 줄게, 하면서.

흠. 나는 내가 상상한 버전의 이유가 더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 '먼지'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나쁘진 않다.

어쨌거나 이 책은 편집자뿐 아니라 편집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내가 올해 읽은 책들 중 단연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책이니, 유쾌하고 말솜씨가 재미있는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더불어 위에서 잠시 언급한 구달 님의 <일개미 자서전>도 같이)!

정말이지, 이 책의 매력을 여기에서 하나하나 다 소개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니 꼭 한번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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