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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도나 저커버그,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by Jaime Chung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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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도나 저커버그,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 도나 저커버그는 '레딧(Reddit)' 커뮤니티의 하위 서브레딧 '레드 필(the Red Pill)'에서 활동하는 남성주의자들을 연구하고 분석했다.

그는 그들이 헤로도투스라든지 오비디우스 같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자주 인용한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것이 그들의 '백인'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주 기가 막힌 일이다. 젠더 이슈뿐 아니라 인종 이슈까지 한 번에 짬뽕으로 가져가니, 상당한 어그로력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매트릭스(Matrix, 1999)>에 등장하는, 진실을 보게 되는 빨간 약 '레드 필'을 먹은 것처럼, 남성들이 오히려 열세에 처해 있고 차별받는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에 상황을 바로잡고 남성의 권익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로마 고전은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바, 즉 '백인' '남성'이 '비백인'이나 '여성'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대신 말해 주는 도구이고.

그래서 그들이 스토아 학파니,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등을 곧잘 주워섬기는 것이다.

이 남성들이 자기 관점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 분야가 고전만은 아니다. 이들은 영국, 독일, 러시아 특히 중세의 역사에도 관심이 있다. 또한 이들은 진화심리학, 철학, 생물학, 경제학에서 문장을 인용하고 또 작성한다. 그중에서도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은 이들과 특별한 유의성을 가진 듯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오비디우스 같은 작가들을 차용하면서 이들은 백인이 지적 권위의 수호자라는 관념을 영속화한다. 특히 이 권위가 여성과 유색인에 의해 위협받을 때면 더더욱 이러한 고전을 차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고대 세계, 그리고 고대 세계에 대한 연구가 미국 대학 내 강의실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득권층'과 '사회정의 전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대학의 지적 정전에서 죽은 백인 남자들이 죽지도 않았고, 백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작가들로 대체되는 경향 속에서 레드필의 백인 남성들은 서구 문명의 문화적 유산의 수호자를 자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전학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천만의 말씀.

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즉, 남성들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저 고전의 텍스트를 뭉텅뭉텅 잘라와 끼워맞출 뿐이다.

고대 문헌에 대한 레드필의 분석은 환원주의적이고 많은 오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고대 문헌을 분석하지 않는다. 고전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고대 세계에 대한 독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재현에 가깝다. 이들은 젠더화된 행동 모델을 이상화하며, 이를 위해 지난 2,000년간 인류가 일궈온 사회적 진보는 지워버린다. 이들은 고대 문헌으로 그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일례로,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다른 이의 행동과 관념이 우리희 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페미니스트 작가의 얼굴과 사상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보다 스토아철학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행동은 없다."

하지만 대중성을 띤 자기 계발 철학의 한 종류처럼 스토아철학의 유행을 반기는 이들은 스토아철학이 안티페미니스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러한 무시가 놀랍지는 않다. 이들을 비롯해 피상적인 수준으로 고대 스토아철학의 텍스트를 공부하는 다른 이들은 스토아첧가 사상가들이 덕성에는 성(性)의 구분이 없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 덕망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레드필이 사랑하는 철학인 스토아철학은 사실 학자들 사이에서 모든 고대 철학 가운데 가장 페미니즘적인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초기 스토아철학 사상가들은 심지어 급진적인 젠더 평등을 믿었다. 따라서 스토아철학을 옹호하는 주류 작가들은 이 학문이 안티페미니스트돌로부터 언급되는 현상을 근본적인 오해 또는 돌연변이로 여겨 무시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아철학이 현대만큼 진보한 학문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네들이 자신의 주장을 위해 스토아철학을 갖다 쓰는 게 적절하다거나 옳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자무식자들이 그리스﹒로마 고전을 인용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렇게 하면 '여자들은 원래 다 그래'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히폴리투스>를 들이밀면서 "거봐, 여자들이 겁탈당했다는 거짓 고발은 믿을 가치가 없어!" 또는 "여자들은 원래 음탕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히폴리투스>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파이드라가 아프로디테가 불어넣은 비이성적인 정욕에 휩쓸려 자신의 의붓아들인 히폴리투스에게 정욕을 느끼게 되고, 이를 혼자 간직하려 하며 시름시름 앓는다. 유모를 통해 파이드라의 마음을 알게 된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계모를 거부한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파이드라는 자결한다. 남편 테세우스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의 아내를 겁탈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해 포세이돈에게 히폴리투스의 죽음을 간청한다.)

 

그리스﹒로마 고전은 그 시대에 쓰였으니까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때와 사고방식, 받아들이는 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전 작품에도 물론 문학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차이점을 무시하고 그냥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예술은 물론 그 가치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나 인권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예술이 그대로 가치가 있다면 세르비안 필름이나, 아니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촬영 과정 중에 배우들에게 정신적 상처를 입힌 영화 같은 것도 옹호해야지. 말이 되나? 

김동인의 단편소설 <광염 소나타>처럼, 아무리 아름답고 뛰어난 에술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제작이나 감상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걸 우리가 어떻게 즐길 수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책의 이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2015년, 컬럼비아 다문화 자문위원회 소속인 네 명의 학생 위원은 <컬럼비아 스펙테이터(Columbia Spectator)>의 논평 코너에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컬럼비아 대학의 핵심 교육과정에 포함하는 일이 어떻게 성폭력 생존자 학생의 외상 후스트레스 장애(PTSD)를 유발할 수 있는지에 관해 기고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다루는 주에, 학생들은 페르세포네와 다프네 신화를 읽어 오도록 되어 있었다. 이 수업에서 다룰 텍스트에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작품 전반에 들어 있는 구체적인 강간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성폭력 생존자였던 학생은 트리거가 눌렸다. 그럼에도 교수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의 풍부함에 집중하면서 텍스트를 가지고 수업을 해나갔다고 학생은 말했다. 결과적으로 학생은 수업 중 토론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그 시간 동안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가 수업이 끝나고 이에 대해 말했을 때, 그의 관점은 무시당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문학과 인문학 수업의 읽을거리나, 서구 정전 가운데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교실 내에서 학생의 정체성을 주변화할 수 있는 공격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배제와 억압의 역사와 내러티브로 쓰였기 때문에 성폭력 생존자, 유색인, 혹은 저소득층 학생이 읽고 논의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죽은 백인 남자들의 이름을 빌려 남성이 우월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복속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자들은 그냥 다 뒤졌으면.

문학은, 그리고 인문학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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