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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진송, <아니 근데 그게 맞아?>

by Jaime Chung 202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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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진송, <아니 근데 그게 맞아?>

 

 

나는 미디어 비평을 좋아한다. TV나 영화라는 건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고 대중적인 매체인데, 그렇기 때문에 무지성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다가는 바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재밌게 본 프로그램을 (사실 나는 ‘웨이브’나 ‘티빙’ 같은 것도 안 써서 한국 프로그램을 볼 일이 대체로 없다) 이런 면은 이렇게 비평할 수도 있구나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게 내게는 미디어 비평서의 가장 큰 매력이다. 또한,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처럼, 내가 직접 보지는 않은 TV 프로그램이라도 비평을 통해 ‘이러이러한 프로그램이구나’ 하고알게 되는 것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안 보는 사람은 절대 안 보는, 호불호가 강한 TV 프로그램 장르 중 하나가 연애 프로그램, 그것도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이다. 나는 내 연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연애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데, 그래서 <나는 솔로>가 도파민이 터진다는 평을 인터넷에서 보고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 의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하다 못해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 연애가 왜 궁금하지? 둘째, 그래,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일단 연애하는 걸 그냥 담백하게 다큐멘터리처럼 보여 주면 안 되나? 왜 연예인들 패널이 그걸 보면서 리액션하는 것까지 시청자인 내가 봐야 하는 거지? 특히 나는 이 두 번째 의문이 더 컸는데, 저자가 ‘‘그’ 연애만이 정답이라는 착각’이라는 꼭지에서 이렇게 쓴 걸 읽고 의문이 풀렸다.

〈돌싱글즈3〉 〈하트시그널2〉 〈러브캐처2〉 〈연애의 맛3〉 〈연애의 참견3〉 〈환승연애2〉 〈솔로지옥〉…. 뒤에 붙는 숫자가 보여주듯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로 제작 중인 연애 관찰 토크쇼들이다. 관찰 토크쇼는 관찰 예능에 관찰자적, 매개자적, 조언자적 역할을 하는 패널이 개입하는 형태를 말한다. 패널은 시청자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시청자에게 정서적 밀착을 유도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액자식 구성처럼, 연애하고 관계 맺는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있다. 이들이 찍은 영상을 패널들이 스튜디오에서 지켜보며 코멘트하고 리액션하는 구성이다. 패널은 삼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각자의 행동을 해석하고, 평가하며, 과몰입한다. 여기에는 패널 개인의 가치관과 연애관, 그리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바람직한’ 연애 규범이 반영된다. 그러다 보니 패널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발생해서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시청자는 암묵적으로 연애의 성 각본과 태도를 학습하게 된다. 이성애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성 역할과 연애 각본, 암묵적인 규칙 등이 촘촘하게 교차하는 그물이다. 그리고 연애 관찰 토크쇼는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적 연애’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검토하는 장이다. 출연자의 언행을 보고 반응하는 패널의 대사를 통해 이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 수 있다. “○○○ 왜 저래?” “□□□ 씨는 멘트 장인이에요.” “△△△ 씨는 남자의 마음을 아네….”

관찰 예능은 대본 없는 자유로운 포맷으로 보이지만, 편집과 해석을 거친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 출연자와 패널은 관찰 토크쇼라는 세계관 안에서 그 문법에 따른다. 시청자는 익숙하고 편안한 레퍼토리를 선호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같은 수의 이성 남녀가 출연하고 이성애적 감정 교류를 나누며 ‘썸’이 연애로 이어지는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긴다. 출연자의 나이에 따라 썸에서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성 각본에 따라 바람직한 연인상/배우자상이 제시된다. 관찰자(패널)의 시선에 따라 출연자의 행동이 규정되기도 한다. 〈하트 시그널2〉에서는 여성 출연자가 몸을 꼬는 것을 보고 이를 ‘배배 시그널’이라고 부른다. 패널은 이를 무의식적인 마음의 표현으로 해석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보편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행위(한때 ‘그린 라이트’로도 불렸다)가 교과서처럼 공식화된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애의 ‘문화적 각본’인 리액션이 좋은 여자 출연자를 패널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여자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남자들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는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남성 출연자에게는 남성성을 효과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팔굽혀 펴기, 볼링 치기, 떡메 치기 같은 과제가 주어진다. 그러나 친밀한 감정을 쌓아가는 단계에서 얻을 수 있는 조언이나 정보는 ‘여자는 남자에게 공감을 바란다’ ‘여자는 늘 여자가 되고 싶다, 아껴주길 바란다’ 같은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주입식 문장뿐이다.

남들 연애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패널들을 통해 ‘연애는 이런 거다’ 또는 ‘남자는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라는 기존의 낡은 사고방식을 시청자들에게 떠먹이니까 나는 사실 그게 불편했던 거다! 어차피 편집 과정에서 제작진들의 해석, 의견, 이해 관계가 반영되는데 그것마저 시청자들이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도 않고, 자기네들 입맛에 맞는 패널들 반응까지 시청자에게 주입하려 하는 짓 좀 그만했으면.

 

내가 이전에 읽은, 에밀리 헨리의 <The Book Lovers>는 ‘차가운’ 도시 여자-’따뜻한’ 시골 여자라는 상반되는 개념을 여주인공과, 그 여주인공의 전 남친이 새로 사귄 여자 친구 캐릭터에 대입시켰다. 간단히 말해, 커리어 우먼이고, 자기 일에 욕심 있고, 세련된 도시 여자는 냉정하고 ‘여성적인’ 매력이 없으며, 순박하지만 싹싹하고 붙임성 좋고 ‘여성적인’ 매력이 있는 여자는 여주인공의 전 남친의 마음을 얻는, 그런 구도였다. 그런 구도를 통해 저자가 의도한 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종류의 여성에게도 행복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결국엔 ‘차도녀’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행복해지는 엔딩이니까). 나는 여성에게 지성이나 야심 같은 덕목보다 싹싹함, (자신을 희생하는) 친절함 같은 덕목을 앞세우는 게 싫었기에 그런 저자의 의도를 이해했고,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분명히 예전에 어디에선가 <응답하라 1988>은 똑똑하고 다소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독립적이기보다는,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들에게도 잘 다가가고 (’치대고’) 싹싹한 것, 즉 ‘정’이 중요시되는 작은 공동체에 잘 적응하는 여성상을 중요시한다고 평한 글을 본 기억이 나는데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다룬 꼭지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내 기쁨과 감탄이란!

〈갯마을 차차차〉 속 세계는 ‘끈끈하고 선량한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윤혜진이라는 서울 깍쟁이 길들이기의 서사가 작동한다. 서울에서 양심 진료를 추구하다 미운털이 박혀 취업이 힘들어진 혜진은 가족과의 추억이 있는 지역 공진에서 치과를 개원한다. 그곳에서 못하는 게 없는 홍반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 초반은 혜진의 좌충우돌 공진 적응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누리던 이들이 공존하면 자연스럽게 충돌이 발생한다. 그런데 유독 혜진의 성격이 깍쟁이, 도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 야멸차고 이기적인 것 정도로 그려진다. 처음 공진에 온 혜진은 레깅스 차림으로 조깅을 해 입방아에 오른다. 내복만 입고 뛴다며 들썩이는 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윤혜진은 운동복이라고 응수하지만 홍반장은 어르신들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설득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타인의 옷차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것은 무례하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교정 대상은 언제나 혜진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살짝만 들춰보면, 공진은 불법 촬영과 소문이 난무하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끼리의 단톡방이 있고, 남숙은 툭하면 마을 사람들을 몰래 찍어 단톡방에 사진을 뿌린다. 혜진은 홍반장과 아무 사이가 아닐 때도, 지PD가 등장했을 때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여성에게 평판, 특히 성적인 소문은 치명적이다. 게다가 남숙은 더 싸게 치료할 방법이 있다며 혜진의 환자들을 불법 시술로 빼돌린다. 혜진이 불쾌함을 표시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개입해 남숙의 아픈 과거를 늘어놓는다. 남숙은 어린 딸을 병으로 잃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뒤로 남숙이 더 기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숙이 아무리 마을을 헤집고 다녀도 관대하게 군다. 그 사실은 남숙의 불법 촬영과 사생활 침해, 허위 사실 유포와 무관하다.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혜진은 이 이야기를 들은 이상, 다른 사람들‘처럼’ 남숙을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 냄새 나는 공진 주민이다. 혜진이 호소하는 피해와 불쾌함은 예민한 서울 깍쟁이라서 그렇지만, ‘우리’의 진실을 알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가스라이팅이 별건가? 이런 게 가스라이팅이다.

시골에 딱히 환상이 없는 나로서는, 아무리 (드라마니까)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시골을 무조건적으로 정이 넘치고 좋은 곳으로 그리고 서울에서 온 여자 주인공은 길들여야 할, 이기적인 깍쟁이로 그리는 이유를 이해 못 하겠다. ‘사실 평화로워 보이고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시골에도 더러운 비밀은 있었습니다’, 뭐 이런 게 더 흥미롭고 사실에 가깝지 않나? 신안 염전 노예 같은 사건들이 왜 일어났겠냐고요. 폐쇄적인 작은 공동체에서 서로서로 뒤를 봐주다 보니까 범죄가 일어나도 제대로 된 처벌도 못(안)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글을 쓸 거면 그냥 쓰지 마세요. 아무리 ‘힐링’물을 쓰고 싶었어도 그렇지, 세상에 모든 게 완벽한 곳이 어딨어요. 무슨 스텝포드도 아니고(아이라 레빈이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2004)>를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레퍼런스).

 

내가 다른 책들 리뷰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 ⃝린이’ 같은 표현도 대중 매체에서 삼가야 한다. 자기 모에화도 정도가 있지, 털 부숭부숭 난 어른들이 왜 어린이처럼 보호받고 싶고 무조건 우쭈쭈 받고 싶어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그만큼 관용이나 친절을 베푸는 분위기도 아닌데 말이다. 애들이 보호받는 것 같고 배려받는 것 같으니 그게 질투가 나는가 본데, 애초에 이 사회는 그만큼 애들을 잘 배려해 주지도 않잖아요… ‘노키즈존’ 같은 게 버젓이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미숙하고 서툰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약자의 입장을 자처하고 싶은 어른들이다. 저자 말마따나, “어린이는 주식이나 골프, 코인을 하지 않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보라는 정확한 용어가 있음에도 ‘어린이’라는 표현에 ‘서툴고 미숙한 초보’라는 뜻을 입혀 의미를 침해하고, 이제는 어린이날까지 빼앗으려 들다니. 어른은 364일이 자기의 날인데도. ‘인생이 내 맘 같지 않고, 나도 내 나이는 처음이라서 막막하고 무섭기만 한데, 364일이 나의 날이라니?! 이 글은 쓰레기야!’ 울컥했다면 자자, 진정하자. 어른이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팍팍한 세상에서, 어린이처럼 누가 나를 보호하고 귀여워해 주며, 좀 서툴러도 괜찮다고 봐줬으면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우리 사회가 그렇게 어린이를 보호하고 귀여워하며, 충분한 관용을 베푸는가? 노 키즈 존이 창궐하고, ‘맘충’ ‘민폐’ ‘민식이법이 양산한 피해자(운전자)’ 같은 표현과 인식이 공기처럼 퍼진 현실을 보면 할 말이 없다. 당장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초상권 같은 여러 권리를 자연스럽게 박탈당하고, 대부분의 물건 높이와 크기가 나에게 맞지 않으며, 개인의 성향 따위 무시하고 재롱을 부리라고 무대에 올려놓던 세계를. 날 선 일상 속 마주친 어른의 호의와 배려가 얼마나 달콤하고 따뜻했는지, 그게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이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을 수 없는지.

 

어린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슈퍼맨이 돌아왔다>나 <아빠! 어디가?> 같은 프로그램은 ‘정상 가정’에 대한 고정관념만 강화시키기에 유해하다. 애초에 나는 ‘아빠, 어디 가?’라고 제대로 띄어쓰지도 않는 제작진을 믿지 않았기에(’어디가?’는 앞에 무언가 장소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거기가 어디냐고 물을 때에나 맞는 맞춤법이지, 이 맥락에서는 우리가 어디에 가냐고 묻는 건데 그러면 제대로 띄어써야 하지 않는가! 이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프로그램을 만든담?) 이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얻을 때도 나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엄마-아빠-아이 이렇게 구성된 가정만이 이런 프로그램들이 허용하는 ‘정상 가족’이고 그 이외의 형태는 보여 주지 않는다. 동성애자 커플이나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돌봐주는 가족이 등장한 적이 있나? 이런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여자들, 엄마들이 애 보는 건 당연한 거고, 남자들, 아빠들이 (<슈돌>의 설정처럼) 48시간 정도 전담해서 애를 보는 건 기특한 건가? 이런 프로그램들은 여자(엄마)들은 애 보는 데 능숙한 게 당연한 거고, 남자(아빠)들은 우당당탕 실수투성이여도 괜찮다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는데, 여자들은 뭐 그럼 태어날 때부터 애 보는 지식이 뇌에 탑재된 채로 태어난답니까? 엄마나 아빠나 다 부모 노릇이 처음이니까 배워 가면서 키우는 거지, 왜 남자들이 깔짝깔짝 애 봐주는 거에 그렇게 칭찬을 하고 고마워해야 하지? 거칠게 말해서, 네 자식 아니세요? 😩 본인 자식을 당연히 본인이 돌봐야지. 이 얘기는 했다간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나머지는 인용문이 해 줄 것이다.

2013년부터 KBS2에서 방영된 〈슈돌〉에는 총 20명 이상의 슈퍼맨과 그보다 많은 아이가 출연했다. 출연진은 모두 남녀 간의 결합과 출산으로 이뤄진 혈연적 공동체고,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졌다. 추성훈과 샘 해밍턴은 언뜻 다양성을 고려한 듯 보이지만, 한국인의 정서상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추성훈은 한국계 일본인이고 샘 해밍턴은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이다). 프로그램은 이들을 ‘대한민국 대표 아빠’로 호명한다. 다정다감하고 경제적으로 유능하며 48시간을 통째로 아이에게 내줄 수 있는 노동 환경의 성인 남성이 한국 사회의 보편적 아빠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슈퍼맨은 표본 집단인 척하는 소수의 예외다. 현실적으로 가정을 멀리하다가 돌아온 아빠는 슈퍼맨보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처럼 불쾌하고 낯선 무언가에 가깝지 않을지…. 그러나 시청자는 별 거부감 없이 이들을 받아들인다. 시청자가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은 주로 경제적인 부분이지, 당연하게 양육자는 ‘엄마’와 ‘아빠’이고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상 가족 세계관이 아니다. 살갗에 닿는 현실이 어떻든, 그러한 설정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슈돌〉을 포함한 여러 육아 예능에서 아빠, 혹은 엄마는 혈연으로 맺어진 자식과 유전적 유사성을 발견하며 감동하고, 자신의 부모를 소환하여 ‘자식 사랑’은 세대 불문 공통의 감정이라고 설파한다. 엄마는 깔끔하고 능숙한 돌봄의 주체(여야 하)고, 아빠는 돌봄이 서툴러도 사랑이 있으니 괜찮다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격려받는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거나 그런 감정을 알아가면서 점차 ‘성장’한다. 아이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환경이 펼쳐지고, 아이들은 한입에 쏙 넣기 좋은 디저트처럼 귀엽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만 편집된다. ‘노 키즈 존’과 같은 차별과 배제는 이 따끈하고 말랑한 세계에서 흔적 없이 지워진다. 〈슈돌〉은 48시간이 지나면, 〈아빠! 어디가?〉는 여행이 끝나면 아빠가 육아를 전담하는 ‘특수’한 상황이 종료된다. 엄마가 돌아오거나 구성원이 모두 모일 때 비로소 가족이 완성되고 안정을 찾는 내러티브 또한 자주 등장한다. 모든 가치가 집과 가족으로 회귀한다. 감동 코드와 귀여움의 잽을 넋 놓고 맞고 있다가 별안간 진한 가족애 펀치에 쓰러지는 것이다. 으윽, 어쨌든 가족은 이 험한 세상에 유일하게 기댈 만한 최후의 보루라고? 아름답고 온전한 거라고? 세상에는 가족 때문에 피 흘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는 절대 저런 가정을 꾸릴 수 없는데?!

 

이것 외에도 인용하고 싶은 ‘맞는 말’ 대잔치가 펼쳐지지만 나머지는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진짜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고, 또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정말 좋은 책이다. 참고로 저자는 내가 이전에 리뷰한 <연애하지 않을 자유>,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도 썼다. 이 책들도 모두 재미있으니 오늘 소개한 책이 마음에 드신다면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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