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마샤 웰스, <머더봇 다이어리: 로그 프로토콜>

내가 여태까지 두 번이나 언급한, 애플TV의 드라마 <머더봇(Murderbot)>의 원작이 되는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의 셋째 권(1권 <머더봇 다이어리: 시스템 통제불능> 리뷰, 2권 <머더봇 다이어리: 인공 상태> 리뷰). 이번에는 머더봇이 라비하이랄에서 조사를 마치고, 코퍼레이션 림 바깥에 있는 밀루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수송선을 탄다.
이 3권은 내가 이 시리즈에 대해 느끼는 불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그 이야기를 파악하기 위해 내가 거쳐야 하는 어려움이 너무 크다. 매번 새로운 인물들이 세 명 이상 등장하고 그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구분해 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쟤는 저러저러한 사람이다 하고 파악하기에는 주어지는 정보값이 너무 적다. 인물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인물을 딱 떼어서 구별할 정도로 각각의 인물 파악이 잘 안 된다는 게 문제다. 비유하자면 <해리 포터>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이라는 중심 인물 외에 호그와트 교수들, 그리핀도르 친구들 또는 다른 기숙사들 학생들 이름을 대면 대충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딱 떠오르지 않나. 근데 이건 머더봇 빼고 다른 인물들은 잘 모르겠다. 2권에 등장한 수송선 ART 말고 다른 세 명의 인간 고객은 여전히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된다. 이번 책도 (종이책 기준) 236쪽으로 길지 않은데 이야기가 계속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 흥미로운 뒷이야기라거나 개성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는 장면 같은 걸 제공해 줄 여유가 없다. 머더봇만이 여태까지 읽은 3권 중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는 유일한 인물… 이거 머더봇 원탑물이었네… 이럴 거면 뭐하러 매번 새로운 인물들 등장시키면서 인물 파악도 어렵게 해요?
3권에 멘사 박사가 조금 언급되기는 한다. 2권에서도 머더봇이 멘사 박사네 일행을 떠나 자기 갈 길을 가는 와중에 보존 연합 팀이 델트폴이나 그레이크리스와 관련해 인터뷰를 했다고 나온다. 3권에서도 여전히, 1권에서 있었던 일(그레이크리스가 보존 연합 탐사대를 몰살시키려 했던 일)과 관련한 법적 소송은 계속 진행되는 듯하다. 거기나 여기나 법적 분쟁이 시간 오래 걸리는 건 마찬가지…
멘사 박사를 다시 보자 뜻밖에도 기분이 좋았다. 배율을 높여 얼굴을 자세히 보니 피곤한 기색이었다. 배경만 봐서는 멘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인터뷰 내용을 재빨리 훑어봐도 장소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나는 멘사가 보존 연합에 돌아가 있기를 바랐다. 만약 아직도 자유무역항에 있다면 괜찮은 보안업체와 계약했기를 바랐다. 그러나 멘사가 보안유닛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그건 노예제도야” 운운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내 피드에 의료시스템이 없어도 나는 멘사의 눈 주위 피부 변화로 보아 그가 만성 수면 부족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짝 죄책감을, 말하자면 그에 준하는 감정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그게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를 바랐다. 내가 탈출한 건 멘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대량 살상 전력이 있는 폭주한 보안유닛을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 속에 풀어놓은 책임을 멘사에게 지우려 들지 않기를 바랐다. 당연히 그건 멘사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멘사는 나를 보존 연합으로 보낸 뒤 그곳에서 뭐랄까 문명화시키거나 교육하거나 뭐 그런 일을 할 생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나도 잘 몰랐다. 내가 분명히 아는 건 보존 연합에는 보안유닛이 필요 없다는 사실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안유닛을 자유인으로 간주한다는 건 내게는 인간 ‘보호자’가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냥 소유주라고 부른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또 재미있는 점을 소개한다면, 머더봇이 인간과 너무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는 않으면서 여전히 인간들이 만들어낸 ‘엔터테인먼트’에는 끌리는 점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내가 보안유닛이었어도
식당에서 벌어진 싸움을 뜯어말린 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인 인간들을 위한 인간관계 상담사로서의 짧은 경력을 끝마치려고 내 침상에 숨었다. 웜홀을 빠져나와 해브라튼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나는 정거장의 피드에 접속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일정을 확인해야 했다. 새로운 미디어를 내려받을 기회도 갈망하고 있었다. 최근에 본 새 드라마는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갈수록 짜증이 났다. 테라포밍 사전 조사(테라포밍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가 갑자기 적대적인 동물과 돌연변이 침략자와 벌이는 생존 싸움으로 탈바꿈하는 내용이었다. 인간들이 너무 무력해서 재미가 없었고 결국 다들 죽어버렸다. 우울하게 끝날 거라는 게 짐작이 됐고 그런 내용을 볼 기분이 아니었다. 영웅적인 보안유닛과 흥미로운 외계인 유물을 추가하면 멋진 모험 이야기가 될 거라는 게 눈에 선해서 더 짜증이 났다.
보증 회사가 모종의 전문적인 보안장치 없이 탐사를 보증할 리가 없었다. 그건 비현실적이었다. 영웅적인 보안유닛도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내가 ART에게 말했듯이 올바른 비현실과 잘못된 비현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돌연변이들이 탐사대의 생물학자를 먹으려고 끌고 가는 장면에서 시청을 중단했다. 농담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막으라고 나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다.
수송선 승객에게 닥칠 수 있는 운명에 관해 생각해보려 해도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력한 인간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똑똑한 인간들이 서로 구해주는 걸 보고 싶었다.
진짜 현실보다 미디어 속에 그려진 모습이 더 재미있고 매력적인 건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
4권 <머더봇 다이어리: 탈출 전략>에는 멘사가 다시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쯤 가야 내가 1권에서 만나고 드라마를 통해 익숙해졌으며 심적으로 가까워진 인물들을 다시 만날 수 있구나… 만약에 5-7권에 이 사람들 다시 등장 안 하면 나는 무슨 낙으로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를 읽을까… 내가 좋아하는 구라틴이나 다시 보게 해 달라고요… 어쨌거나 드라마 <머더봇>으로 이 작품을 알게 된 팬들은 다소 실망할 수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 적어 보았다. 나는 원작 소설도 재미있다 생각했지만 진짜 머더봇 빼고 개별 인물 묘사에 인색한 점은 이 책의 매력에 마이너스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시리즈를 다 읽으려고 시도하겠지… 내가 <머더봇 다이어리> 시리즈의 모든 이야기(장편 소설뿐만 아니라 팬들이 0.5권으로 치는 단편소설들까지)를 다 읽을 때까지 한번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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