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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지비원, <왜 읽을 수 없는가>

 

 

최근 '심심한 사과의 말씀' 논란이나 '사흘' 논란으로 인해 (이 논란들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 요즘 세대의 문해력에 대한 탄식과 비판이 많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단어도 모르냐', '모르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뻔뻔하게 왜 어려운 말을 쓰냐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게 더 문제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 맞는 말이고 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대방에게 문해력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해시켜야 한다면?

이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지비원의 <왜 읽을 수 없는가>라는 책을 추천받게 되었다(글 하단 링크 참조). 저자는 주로 일본어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편집자 겸 번역가이다. 그는 노야 시게키의 <어른을 위한 국어 수업>이라는 책을 번역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게 바로 이 책이다.

요즘 10대, 20대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교육자들(교과서나 인문, 과학 등 전문서적의 저자들 포함)이나 현대 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 업인 기자들이 비판만 하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는 '들어가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는 없고, 전문 분야에 따라 그 해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출판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견해를 내놓을 만한 주제는 못 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들,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의 문장을 많이 다루었고, 이를 오류가 없고 되도록이면 독자층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전달해야 하는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어떤 '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글쓴이와 그 글을 편집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 때문에 나는 '안 읽는' 독자들을 먼저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 자신이 쓴 글에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문장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글이 길고 조금만 어려워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질책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넓고 얕은 지식'이든 뭐든, 기왕이면 머릿속을 채우는 게 채우지 않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전문가가 조금만 재미있게 설명한다 싶으면 시청률이 그렇게 뛰어오르는가? 왜 '넓고 얕은 지식'을 표방하는데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가? 단언컨대 사람들이 웬만하면 교양을 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식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한다. 쉽고 얄팍해 보이는 프로그램이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지식욕이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장에는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솔직히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전문 서적이야 전문가를 위해 쓰인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인데도 어려운 게 많다. 글을 전혀 안 읽는,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이해할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초급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없다. 그러니 어떤 주제가 됐든 흥미를 가져도 조금 파 보려다가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뉴스 매체에 실리는 글조차 그냥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이걸 과연 10대, 20대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 보고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가 '뉴스'로 분류되는 글 중에서 가져온 아래 예들을 보시라(순서가 달려 있지만 각각 다른 글에서 나왔으며,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다).

1. 이런 단일 토지세론보다 현대 사회에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것은 그[헨리 조지-인용자]의 정치경제학 밑바탕에 흐르는 자연정의론적 세계관이다. 그가 정치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치경제학에 있는 자유방임론적 요소를 상당 부분 포기했을 것이다.

2. 2020년대에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함의는 그렇다면 뭘까. 바우만의 탁월성은 새로운 개념의 발굴에 있다. 특히 그는 흥미로운 개념틀을 주해 우리 시대를 날카롭게 분석해왔다. 그 대표적인 개념틀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입법자와 해석자'다. 바우만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개입한다. 그에 따르면, 모더니스트들은 확실성과 보편성의 기준을 세우려는 입법자로서의 입장을 취한다.

3.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A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B '기회이성Gel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보자마자 '그게 뭔데 씹덕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연정의론은 뭐고 바우만이랑 슈미트주의자는 누구인가? 이걸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이해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글만 봐도 '네가 이 정도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너와 이야기해 주겠다'라는 오만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글을 대중매체에 써 놓고서 독자들이 이해를 못한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독자인 이쪽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애니 오타쿠가 애니 캐릭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으면 '으, 사회성 없는 씹덕'이라고 비웃으면서 왜 이런 글을 전문 서적도 아니고 전문가들을 위한 논문도 아닌 '대중매체'에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글의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독자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존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해야 하나?

'나도 이해하고 싶다. 이해하고 싶으니 제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해 달라.' '심심한 사과'나 '사흘' 논란을 일으킨 그 소위 '무식한' 사람들의 심정도 사실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너무나 미세하고 또 자존심에 가려 사실 본인들도 잘 몰랐겠지만 그들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단어인데, 그걸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고서 자기네들이 옳다고 우겼잖아?' 하며 반박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처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뫄뫄 정도는 상식 아닌가요?' 같은 글이 올라오면 언제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시로 든 저런 글을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헨리 조지, 바우만, 슈미트 등을 모르는 나를 무식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잘 안다'와 '모른다', '유식하다'와 '무식하다'의 차이는 언제나 자의적이니까.

솔직히 나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글쓴이들이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 그쳤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대중을 상대로 이해하기 쉬운, 쉽게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교육자 또는 기자 들의 의무이고 또한 그런 글을 읽을 권리가 대중에게 있다. 자기만의 감상에 벅차올라 그것을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씹덕을 만나면 그와의 정상적인 대화를 포기하게 되듯, 이 시대의 많은 이들도 '('심심하다', '사흘' 같은) 어려운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너와 대화하지 않겠다'라는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핸드폰, 인터넷,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접해 긴 글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들을 비웃고 비난만 할 게 아니다.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 후반에는 '어려운 글'뿐 아니라 입문서도 때때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전문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번역해 들여온 용어를 가져왔기 때문임을 (내가 보기에는) 다소 길게 설명한다. 예컨대, '철학(哲學)'이라는 단어는 'philosophy'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번역할 때 만들어낸 단어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왜 'philosophy'가 '철학'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개념인데 번역어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분명히 좋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가 이 책에서 다루어야 할 분량 이상으로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길지 않은 (종이책 기준 180쪽) 좋은 책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교육자나 기자라면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 이 책을 가지고 소통을 위한 읽기와 쓰기의 문제를 해찰한, 뉴스레터 '인스피아(Inspia)'의 해당 이슈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룬 바로 그다음 주에 인스피아 측에서 저자 지비원을 인터뷰한 뉴스레터도 발행했으니 이것도 같이 보시면 좋을 듯.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9kCGVSU0U7UJpNqa4JgbHEVVGmZB5QI=

 

🎓읽을 수 있는 글, 읽을 수 없는 글

 

stibee.com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rbzNPrFofjXitNuX1GYIndfRv58DuNM=

 

🎓사람들은 인문학에 관심 없을까?[지비원 저자 인터뷰]

 

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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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largesse((돈에 대해) 후함, 후한 행위, 부조금[기부금])

 

케임브릿지 사전은 'largesse'를 "willingness to give money, or money given to poor people by rich people(돈을 기꺼이 주려는 마음, 또는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돈)"이라고 정의했다.

"The medical foundation will be the main beneficiary of the millionaire's largesse(그 의학 재단은 백만장자의 기부금의 주요 수혜자가 될 것이다)."

콜린스 사전은 'largesse'를 이렇게 설명했다. "Largesse is a generous gift of money or a generous act of kindness(largesse는 관대한 돈 선물 또는 친절하고 관대한 행위이다)." 포멀(formal)한 표현이다.

"...grateful recipients of their largesse(...그들의 기부금을 받은, 감사해하는 피원조인)." 

"...his most recent act of largesse(...그의 가장 최근 기부금)." 

맥밀란 사전은 'largesse'를 "generous acts of giving presents or money to a large number of people(많은 이들에게 선물이나 돈을 주는 관대한 행위)"이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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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the onus(책임)

 

케임브릿지 사전은 'the onus'를 "the responsibility or duty to do something(어떤 것을 해야 하는 책임 또는 의무)"이라고 정의했다.

"The onus is on the landlord to ensure that the property is habitable(그 집이 주거할 만한 상태임을 보장해야 할 책임은 집주인에게 있다)."

"We are trying to shift the onus for passenger safety onto the government(우리는 탑승자가 안전해야 할 책임을 정부에게 옮겨 주려고 노력 중이다)."

콜린스 사전은 'onus'를 이렇게 설명했다. "If you say that the onus is on someone to do something, you mean it is their duty or responsibility to do it(무엇을 해야 할 onus가 누구에게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해야 할 의무나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포멀(formal)한 표현이다.

"If you ordered something, then the onus is on you to pay for it(무언가를 주문했다면, 당신에게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책임이 있다)." 

"The onus of proof is reversed in libel actions and placed firmly on the defender(증거를 제출해야 할 책임은 명예훼손 사건에서는 뒤바뀌어서, 피고가 그 책임을 진다)." 

맥밀란 사전은 'onus를 이렇게 풀이했다. "if the onus is on someone to do something, it is their responsibility or duty to do it(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할 onus가 있다면, 그것을 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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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라일라 리,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

 

 

일전에 유튜브에서 케이팝의 인기와 그 영향을 분석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자료 화면으로 뒤에 깔린 어느 걸그룹의 뮤직 비디오를 보게 됐는데, 노랫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날씬하고 예쁜 한 걸그룹 멤버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라는 내용의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너는 이미 엄청 날씬하고, 매일매일 전문가에게 메이크업도 받고,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골라 준 대로 입잖아. 완벽하게 관리받은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지금의 너를 사랑하기 쉽겠지!' 맹세컨대 그 멤버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존감 뿜뿜하는'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가 그렇게나 완벽하게 관리된 외모를 갖추고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는 그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기만적으로 들리거나, 최소한 원래 의도보다는 미약해진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노래를 비만인 사람이 부른다고 하면 맥락도, 메시지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분이 이미 알다시피 연예계에서, 특히 아이돌 판에서 마른 몸 이외에 다른 몸은 보기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아이돌들이 화면에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비만인 아이돌은 말 자체가 아이러니일 것이다.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연예인이라면 거의 다 날씬하다 보니 (특히 여자라면 더더욱), 청소년들은 그만큼 더 날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오픈서베이에서 제공하는 <Z세대 트렌드 리포트 2022>를 보게 됐는데, 한국은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래 그래프 맨 오른쪽 항목을 보시라.

출처: 오픈 서베이(https://blog.opensurvey.co.kr/trendreport/gen-z-2022/)

 

자기 몸 긍정주의란 한마디로 '내 몸을 사랑하자'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플러스 사이즈(다시 말해 '뚱뚱한', 또는 비만인)인 청소년이 케이팝 스타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까? 글쎄, 자신감이 엄청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을까(자신감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하겠다)? '케이팝계에서 플러스 사이즈 아이돌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아니, 아니,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 왜 아니냐고? 그거야 이 쇼는 판타지(fantasy; 환상)이니까(No. No, I don’t think we should. Well, why not? Because the show is a fantasy.).

2018년에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의 당시 최고 마케팅 경영자(Chief Marketing Officer) 에드 라젝(Ed Razek)이 '왜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 쇼에는 플러스사이즈나 트랜스젠더 여성을 캐스팅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 말이다(출처). 빼빼 마른 '사이즈 0'의 모델들 말고 좀 더 현실 여성에 가까운 몸매를 가진 여성들을 보고 싶다, 다시 말해 현실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빅토리아 시크릿 쇼는 환상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안 된다'라는 뻔뻔한 말을 하다니. 마른 여성들, 마른 몸매만이 '환상', 즉 바람직한 기준, 이상(理想)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바람직한지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태도가 아주 재수 없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이렇게 '덜'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 태도로, 다시 말해 '마른 여자들만 우리 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장사를 해 왔으니 다른 란제리 브랜드에 비해 뒤처져 수익이며 대중적 인식이 폭망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 태도를 바꿔 '다양한' 몸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보이고는 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 쪽에서 이미 앞서 나간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씀. 이 얘기는 이쯤 해 두자.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 라일라 리는 청소년 소설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에서 케이팝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인 플러스 사이즈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하늘, 영어 이름은 스카이 신. 스카이는 어릴 적부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지만 '뚱뚱하기' 때문에 스카이의 엄마는 스카이가 가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스카이의 아빠와 좋은 친구들이 스카이의 편을 들어 주고 언제나 지지해 준다. 스카이는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라는 경연 프로그램에 도전해 결국 우승을 거머쥐기까지 엄마와의 갈등도 있고 온라인 악플 문제도 겪지만 중간중간에 (LA 한인 타운에서 이미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헨리 조와의 로맨스도 즐긴다.

스카이가 '퀸 스카이(Queen Skye)'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를 모는 것은, 물론 노래와 춤 실력이 탄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뚱뚱한 몸을 가진 많은 소녀와 여자들이 스카이의 편이 된다.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뚱뚱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 걸까?' 물론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게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학력이 좋지 않든, 가난하든, 외모가 좋든 안 좋든, 자기 사랑은 중요하고 또 모든 이들이 하면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완벽한' 몸매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긴장을 놓치면 살이 찔까 두려워 계속 꾸준히 '관리'를 하지 않나. 그런 사람들도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삐끗해서 몸매가 망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존재하니까) 굳이 뚱뚱한 사람들, 이미 벌써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친지, 친구, 주위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구박, 비난을 듣는 이들에게 '네 몸을 사랑해,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하는 게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이냐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넌 왜 당당하지 못해? 널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하는 건 그들에게 이중의 고난을 씌우는 게 아닌가 싶다. 중요한 건 뚱뚱하든 날씬하든 스스로를 사랑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예의를 지키는 게 문제지. 와타나베 나오미(일본의 가수, 예능인, 코미디언)나 리조(Lizzo)처럼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첫째, 뚱뚱하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일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며, 둘째, 그런 비난을 들었을 때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들에게 당당하라고, 다시 말해 '내가 네 몸매를 가지고 놀리고 비웃고 욕해도 너는 쿨하게 넘어가'라고 강요하는 것 좀 그만하고 자기 입이나 좀 관리했으면 좋겠다.

소설 자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페이스가 엄청 빠르다. <너는 나의 샤이닝 스타>의 한 단계 한 단계가 훅훅 진행된다. 심지어 마지막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장면까지 정말 빠르게 진행되어서, "드디어 결과 발표 시간이다. 참가자들 모두 무대 뒤로 모여 댄스와 보컬 파트로 나누어 섰다. 나는 헨리와 이마니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했다." 이렇게 말한 후 바로 다음 문단에서 결과가 발표된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 이 도전이 본인과 다른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들에게 가지는 의미 등을 떠올려 보며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같은 회상을 하는 시간 따위 없다.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바로 결과를 공개해도 되는 건가 싶다. 아니, 물론 청소년 소설이고 이런 소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 모두 다 아니까 결과는 이미 스카이가 이 경연에 참가하는 장면에서 예측 가능하긴 하지만, 작가님, 이렇게까지 긴장감 없이 진행해도 되는 건가요? 사실 내가 지금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결과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게 더 바보같이 느껴진다. 어차피 위에서 결과를 다 스포일러 했는데! 그렇습니다, "헨리의 예상이 맞았다. 내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100점이나 앞서 <넌 나의 샤이닝 스타> 보컬 파트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댄스 파트 우승은 예상대로 이마니가 차지했다." 스카이가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이랍니다! 이거 예상하지 못하신 분?

어떻게 보면 이런 결과가 더 의외일 수 있다. 플러스 사이즈인 여자애가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플러스 사이즈는 둘째치고, 그냥 보통 몸매를 가진 아이돌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이 판국에? 그래서 스카이가 우승을 한다는 결말 자체가 일종의 '환상',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우리가 위에서 '환상' 이야기 한 거 기억하시나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 이야기로 돌아왔네요!). 사실 그런 꿈은 당연히 꿔 볼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미디어에서 먼저 그런 '꿈'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다. 1960년대 미국 TV에서 <스타 트렉(Star Trek)>이 방영될 때 흑인 여성 통신 장교인 '우후라(Uhura)' 캐릭터가 그 당시 흑인 여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듯이. 소수자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미디어에서 보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 스카이가 우승한 것도 비슷한 의미 아닐까. 하지만 작가 자신도 '우승은 했지만 케이팝 스타가 된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앞서갔나?' 싶어서 일단 '우승 특권으로 (스카이의 학기가 끝나는) 다음해 6월에 한국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된다'라는 조건을 단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속편을 염두에 둔 영리한 결정일지도? 만약 속편에서 스카이가 진짜 케이팝 '스타'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면 <넌 나의 샤이닝 스타>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장보라에 대해서도 좀 더 다루어주면 좋겠다. 장보라는 스카이가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첫 단계부터 그녀를 못마땅하게 본다. 다른 두 심사위원들이 '합격'을 줄 때 자기 혼자 '불합격'을 주기도 하고. 은퇴했지만 전성기 시절 잘나갔던 걸그룹 멤버였다는 설정을 살려서 왜 장보라가 스카이를 그토록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조금 확실하게 보여 주면 좋겠다. 예컨대 자기는 걸그룹 시절 식이장애가 있어서 먹고 싶은 걸 제대로 먹은 적이 없는데 스카이 같은 사람을 보면 먹고 싶은 걸 다 먹어서 그런 거라고 꼬아서 보고 미워한 거라든지. 뭔가 이유가 밝혀지고 장보라가 스카이에게 사과해서 둘의 관계가 개선되면 좋겠다. 난 사실 그걸 기대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안 나와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스카이의 엄마는 본인도 어릴 적에 뚱뚱했었고 그걸로 사람들의 눈총, 차별을 많이 받았기에 자기 딸이 뚱뚱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히 스카이는 이런 엄마와 갈등을 겪는데, 후에 스카이가 우승하자 엄마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축하하는 말을 건넨다. 그렇지만 둘이 완전히 화해하거나, 스카이가 '그래도 엄마는 나를 사랑해!'라는 믿음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다소 기운 빠지는, 불완전한 '타협' 정도로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오신 분의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어려울 테니, 직접적으로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게 되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고.

케이팝이라는 소재를 쓴 데다가 플러스 사이즈인 소녀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니 (이는 다시 말해 당연히 십 대의 풋풋한 연애도 딸려 온다는 뜻이다) 트렌디한 십 대용 영화로 만들기에 제격 아닌가. 그래서 이미 2020년 1월에 HBO 맥스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출처; 참고로 이 소설의 영어 제목은 <I'll Be the One>이다). 그런데 HBO 맥스는 2019년 6월에 이미 (역시 청소년 소설인) <언프레그넌트(UNpregnant)>를 영화화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완성된 영화가 2020년 9월에 공개된 점을 고려하면, <난 그저 미치도록 내가 좋을 뿐>은 영화화가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영화화하겠다는 기사 외에 얼만큼 진행이 되었는지, 언제 공개될 건지 왜 아직도 업데이트가 없는지 궁금하다. 설마 엎어진 건 아니겠지? 얼른 영화로 보고 싶은데!

요약하자면,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청소년이 읽기에 좋은 소설이다. 속편도 나오고 이 책이나 영화가 크게 흥하면 좋겠다. 몸매에 상관없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빛내는 꿈을 꾸고 실제로 이룰 수 있도록.

 

➕ 사족: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언프레그넌트> 영화는 내가 평을 쓴 적이 있다. 완전 추천!

2022.05.30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영화 감상/영화 추천] Unpregnant(2020, 언프레그넌트) - 엿 먹어라, 미주리 주 입법 기관! 감독: 레이첼 리 골든버그(Rachel Lee Goldenberg) 영화는 미주리 주의 한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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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screech(꽥[빽/끼익/쌩] 하는 소리를 내다(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냄을 나타냄))

 

케임브릿지 사전은 'screech'를 "to make an unpleasant, loud, high noise(불쾌하고, 크며, 높은 소음을 내다)"라고 정의했다.

"She was screeching at him at the top of her voice(그녀는 그에게 아주 크게 고음으로 소리쳤다)."

"He was screeching with pain/laughter(그는 고음으로 앓는 소리/웃는 소리를 냈다)."

""Don't you dare touch me!" she screeched("내게 손대지 마!"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The car screeched to a halt/standstill(그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The economic recovery is likely to screech to a halt/standstill (= stop very suddenly) if taxes are increased(세율이 올라가면 경제 회복은 급작스럽게 멈춰 설 것이다)."

콜린스 사전은 'screech'를 이렇게 설명했다. "If a vehicle screeches somewhere or if its tyres screech, its tyres make an unpleasant high-pitched noise on the road(차가 어딘가에서 screech 하거나 차의 타이어가 screech 한다면, 타이어가 도로에서 불쾌한 고음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A black Mercedes screeched to a halt beside the helicopter(검은 메르세데스가 헬리콥터 옆에 끼익 멈춰 섰다)."

"The car wheels screeched as they curved and bounced over the rough broken ground(그 차가 거칠고 험한 지역에서 커브를 돌고 통통 튀면서 타이어가 끼익 소리를 냈다)."

맥밀란 사전은 'screech'를 "to make a loud, high, and unpleasant noise(크고, 높으며, 불쾌한 소음을 내다)"라고 풀이했다.

"Brakes screeched and then we heard a crash(브레이크가 끼익 소리를 냈고 우리는 충돌하는 소리를 들었다)."

"There were seagulls screeching over our heads(우리 머리 위에서 끼룩끼룩대는 기러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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