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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지승, <아무튼, 연필>

by Jaime Chung 202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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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지승, <아무튼, 연필>

 

 

솔직히 책 표지는 이상한데 내용은 정말 놀랄 정도로 좋다.

나는 나름대로 '취존'이 잘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도 이런 걸 파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분야를 파는 이, 또는 그런 덕질의 대상을 보면 "아,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죄송합니다…).

몇 년 전에 내 친구가 물고기(집에서 어항에서 키우는 그거)를 덕질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이만큼 놀란 적은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무려 '연필 덕후'이다!

아니, 물론 문구류를 좋아해서 1300K나 핫트랙스 가면 이것저것 쓸어담는 사람은 봤는데, 같은 문구류이긴 해도 '연필'은 뭔가... 너무 사소하다는 느낌?

'만년필'은 그래도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도 비싼 것들은 꽤 비싸니까 굳이 '덕질'이 아니라 '수집', '애호'라는 (다소 우아하게 들리는) 표현으로도 닷소 접해 봐서 놀랍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필이라는 것은, 대개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바로 샤프로 갈아타기 때문에 아주 어린아이들이나 쓴다는 이미지가 (적어도 내게는) 있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필기할 때 굳이 연필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라는 게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의 내 생각이었다(내가 모를 수도, 떠올리지 못헀을 수도, 내가 무지했을 수도, 내가 감히, 내가 또 잘못을...).

 

(연필 덕후님들은 분노하지 마시고, 여기서부터가 진짜 본문이니까, 고정하시고 읽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내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다 저자의 기가 막힌 글솜씨 덕분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건 (연필을 덕질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고) 저자가 '연필'이라는 소재를 여성, 또는 여성주의와 연결지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곧바로 '연필'과 여성을 연결짓는다. 어떻게?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것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학생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연필의 초기 역사는 힘을 들이지 않고 그은 4H 연필 선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연필 같은 초기 발명품들을 만든 장인들이 대부분 무학자여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도 하고, 밑그림이나 초안 아이디어 등은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싸라지는 것들이라 그 과정에서 사용한 연필도 더불어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유든 연필에 관한 기록은 아예 기록되지 않았거나 쉽게 지워져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약자와 소수자들의 역사처럼.

연필이라는 명칭과 그 실체가 우리 가 익히 아는 현대의 그것과 가까워지는 건 대략 17세기 말, 그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에 한해서였다. 유럽에서 발명하고 미국에서 완성했다는 연필을 미국에서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건 19셋기 초반에 이르러서다. 1840년쯤 미국에서 최초로 흑연 심 연필을 만든 사람은 한 여학생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ㅆ다. 여학생은 영국 보로데일(Borrowdale) 흑연 조각을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아라비아고무, 아교 용액에 섞어 굳혔다. 뜨개질 바늘을 이용해 딱총나무 가지 속을 비우고 굳은 흑연을 끼워 쓰는 과정은 기록 속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전해들을 수는 없다.

연필은 앞에서 내가 말한 만년필처럼 '고오급'스러운 필기구가 아니다. 구하기도 쉽고, 저렴하며, 아이들도 쓰는 있는 물건이다.

또한 연필은 쉽게 지워지기 때문에 최종적인 결정, 또는 확실한 사실을 기록할 때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을 연습할 때처럼 쉽게 지워 버릴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을 때 쓴다.

이런 '권위 없음'은 여성의 처지와도 닮았다. 쉽게 지울 수 있는 연필을 가지고 남성 결정권자가 결정을 내리기 전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내용을 수첩에 받아적는, 또는 권력자의 미팅 약속을 스케줄러 따위에 적어넣는 비서처럼, 여성은 대체로 타인을 돕고 보조하는 일을 맡는다.

연필과 펜슬스커트와 아이브로펜슬은 하나의 검색어에서 태어난 혈연들처럼 연결되었다. 아이브로펜슬로 화장을 하고 펜슬스커트를 입은 여성 비서가 연필을 들고 있는 70, 80년대 미국의 지면 광고는 그 세 가지를 한 장에 모두 담는다. 광고 속 여성의 이미지만으로 보면 세월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뉴트로 유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지 속 여성의 역할과 업무 라인이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이다. 주로 여성이었던 비서는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임시로', '예비로' 쓴다. 마지막 결정, 명령, 실행은 대부분 남성 상사의 결재로 이루어지며 공공의 의미 체계를 획득하는 결재란의 그 표식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나 만년필로 남겨졌다. 그곳은 연필의 자리가 아니다. 연필의 자리가 아니면 여성인 나의 자리도 아니기 쉬웠다. 비서가 타이핑하는 문서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공식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문서의 효력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서명으로부터 여성은 지속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저자는 연필과 여성을 연결짓는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엄청 재미있다. 책의 앞부분은 저자가 자라며 연필과 관련된 기억을 추억하는 부분이라 다소 쓸쓸한 분위기가 드는데, 그것만 벗어나면 바로 유쾌한 분위기로 변모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

우리가 벽에 말을 거는 건 괜찮지만(나는 주로 냉장고) 벽이 대답을 하면(냉장고는 자주 대답을 한다) 병원에 가보라는, 자가 격리 시대의 자가 멘탈 검진용 조언은 유효하다. 양배추의 잎맥이 자꾸 말을 건다고 양배추를 병원에 보내는 건 좀 그래서 내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 때마침 모 재단에서 운영하는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었다. 10회에 걸친 심리 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양배추는 잎맥을 꿈틀거리며 분명 내게 좋은 시간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말이냐가 아니고 양배추가 말을 하는 것임을 내가 잊지 말아야 할 텐데….
(...) 나처럼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이상한지 잘 모르기 쉽다. 이상함의 정도를 체크할 상대적 리스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양배추가 말을 건다고 하면, 서양배추니까 영어로? 라고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나의 친구들아 보아라). 그 리스트를 제공해준다는 면에서도 상담은 유용했다.

저자가 상담가와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라고 말하자, 상담가는 "지승 씨,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단다.

유머로 읽는 이의 긴장을 풀어 놓고 나서 저자는 이 사실을 연필과 연결짓으며 깨달음으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다들 알다시피, 흑연이나 다이아몬드 둘 다 탄소로 구성돼 있다. 

다이아몬드와 흑연 구성 성분의 일치와 구조적 차이를 소비하는 한국적 방식은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다. 이 자기 계발의 나라에서 둘은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예시로 곧잘 쓰였다. 흑연처럼 헐렁하고 약하고 잘 부서지는 이들은 패배자가, 고온과 고압을 견딜 만큼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승자가 되었다. 그 뒤로 당연한 수순처럼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어떻게 하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즉, 다이아몬드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할 거라고 전제한 글들이 많았다. 그중 '작은 자극에서 무너지는 흑연 같은 삶'을 나무라는 표현은 당황스럽게 문학적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과 포기해지고 더해지고 섞이는 삶을 쌍상하는 건 무너지고 부서져본 사람들이다. 홀로 단단할 수는 없어서 '약한 인간 1'과 '약한 인간 2'가 손잡고 '좀 덜 약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먹먹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들이다. 몇 세기에 걸쳐 흑연에 점토(주로 고령토)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이고 잘 부서지지 않는 연필심을 만드는 데 투자한 것도 흑연의 약함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어둡고, 가벼우며, 검은 광택을 가진 흑연은 어째서 아름답지 않다는 건가. 과도한 열정 없이 언제든 자유로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이 검은 친구가.

(...)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쑤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정말 기가 막힌 발상 아닌가. 연필과 여성을 잇고, 다이아몬드와 흑연을 비교하는 말을 살짝 틀어서 '약한 인간들'을 위로하는 말로 바꾸어내다니.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가 연필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추억과 명상을 담은 부분이라면, 2부는 역사적 인물(대개 작가들, 그리고 전부 여성들)과 그들의 연필에 대한 글이다.

2부에서는 버지니아 울프, 다와다 요코, 도롯시 파커, 조앤 디디온, 루이자 메이 올컷 등의 인물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어서 뭔가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석 같은 (아니, 흑연 같다고 해야 하나?) 책을 만나게 되어 정말 너무 기쁘다.

연필도 덕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흑연처럼 까맣게 빛나는 통찰을 전해 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참고로 이 책은리디셀렉트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이 책 외에도 내가 사랑하는 '아무튼' 시리즈도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거들떠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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