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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최민영, <아무튼, 발레>

by Jaime Chung 202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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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최민영, <아무튼, 발레>

 

 

서른아홉 살에 취미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저자가 발레의 매력을 아주 유쾌한 글솜씨로 담아냈다.

솔직히 나는 발레를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저자가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해서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의인화하자면, 마치 '발레 한번 해 보세요!' 하고 눈을 찡긋 하면서 은근히 부추기는 취미 발레인 언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발레 체형'은 아니어도, 발레를 사랑하고 즐기는 언니.

'몸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기초반 한 달만 들어 보고 계속할지 결정하라'는 발레 학원 데스크 담당자의 말에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라며, 결연한 표정으로 신용카드를 내밀며 3개월을 일시불 선결제 한 언니(실제로 저자가 그랬다고).

 

저자의 원래 직업은 기자인데, 그래서인지 표현력이 정말 뛰어나다. 발레를 잘 몰라도 어차피 저자가 잘 설명해 주고, 그 설명을 또 이해 못해도 비유가 기가 막히기 때문에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예컨대, 발레에는 발 동작이 정해져 있다. 1번 발, 2번 발, 하는 식으로. 팔 자세도 규칙이 있어서 딱 정해진 곳으로만 움직여야지, 아무 데나 팔이 돌아다니면 안 된다.

그렇지만 1번에서 6번까지의 발 동작과 네 가지 팔 자세를 몰라도 저자의 이런 표현 하나면 다 이해가 간다.

이후에는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규칙도 모르겠고, 용어도 모르겠고, 음악에 박자는 맞춰야 되겠고, 내 몸은 마치 광고용 바람인형처럼 움직였다. 다리 동작을 하면 팔이 공중에서 헛짓을 하고 있고, 팔 동작에 신경을 쓰면 다리가 엉뚱한 데로 가 있었다. 동작 순서를 몰라서 앞사람을 곁눈질로 보고 따라 했는데 알고 보니 앞사람도 틀렸다.

 

아니면 이런 비유. (참고로 아래 인용문에서 '플리에'는 스쿼트 비슷한 발레 동작이다. '그랑 플리에'는 그냥 플리에보다 더 깊숙이 아래로 내려가는 동작이고.)

반면 나는 근육 부피는 컸지만 속근육 힘이 형편없었다. 둘레로는 클래스 으뜸인 내 허벅지는 뻥과자는 다름없었다. 플리에는 할 때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매번 두개골을 비롯한 상체 토르소가 인체에서 얼마나 많은 무게를 차지하는지 실감이 났다. 발레는 우아한 춤인데 나는 그와 백만 광년쯤 멀었다. 바를 잡고 버둥버둥 올라오기 일쑤였다. 특히 2번 그랑 플리에를 할 때는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보기가 괴로웠다. 스모 선수의 준비 자세나 봉산탈춤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그럴법한 자세인데, 복장은 몸에 꼭 달라붙는 핑크색 타이즈에 레오타드를 입고 있으니…. 낫토를 얹은 초콜릿 와플이나 두리안을 넣은 김치 같은 '괴식'의 몸 버전이랄까.
물론 농담이 아니었다. 점프 동작을 할 때 선생님은 적당히 뛰어도 우아한데 나는 제주목장에서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히히힝 뒷발 차는 청소년 망아지처럼 보이는 건 '플리에 부족' 때문이었다. 위로 뛸 생각만 하니까 아래로 충분히 낮아지질 못하는 거다.

그리고 플리에에서 김성모 화백의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라는 대사를 떠올리고 플리에에서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플리에 같은 삶의 순간을 떠올리며 깨달음을 얻는 내공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아, 푸에테(발레의 터닝 동작)를 시도하려다 실패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휘청이는 학생들이 '아싸 호랑나비' 군무를 선보일" 때라고 표현해서 어찌나 웃었는지. 

저자는 발레 학원 수강생들이 발표회를 위해 군무를 배워서 연습하는데 하도 못해서 선생님께 죄송하단 말도 정말 재미있게 했다.

우리는 담당 A선생님께 연민과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군무는 조화가 생명이고 한 치라도 어긋남이 있을 때는 그 아름다움이 흐트러지는데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해석한 춤을 따로 추고 있어싸. 원래 안무의 라 스칼라(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오페라 극장) 버전 동영상을 처음 봤을 때 다들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이 춤을 지금 이렇게 추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발레계의 설리반 선생님 같았다. 그분이 재채기를 하면 코에서 사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 책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가 풍부하기도 하다. 발레 동작이 소개될 때마다 이런 거라고 알려 주고, 발레를 할 때 입는 레오타드라든지 발레 할 때 신는 토슈즈 등에 대한 지식도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배울 수 있다.

토슈즈를 처음 신을 때는 가운데를 꺾은 후 북어 패듯 패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 아셨는지? 나는 이 책에서 처음 배웠다(설마 나만 몰랐던 건 아니겠지?).

그리고 각 나라마다 추구하는 발레의 방향이라고 할까, 좋아하는 발레 취향이라고 할까, 그런 게 다르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러시아 스타일은 힘 있고 단순하면서도 쭉쭉 뻗어나가는 선을 지향하는 반면, 프랑스는 귀엽고 우아하고 발동작이 더 많으며, 관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더 중점을 두는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서 <지젤>이나 <라 바야데르> 같은 고전 작품도 어느 나라의 버전인지에 따라서 조금씩 동작이 다르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발레는 폭발적인 힘과 속도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각 나라 관객의 취향에 따라 발레 스타일도 영향을 받는 셈이다.

 

저자가 발레를 하면서 "거북이처럼 굽었던 등과 어깨가 펴졌고, 골반 위치를 바로잡으면서 배가 들어갔다"고 하니 이 말만 들어도 혹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나도 이미 발레를 한 4년쯤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로 할 필요까지 있나?' 싶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발레를 잘 몰라도, 솔직히 별 관심이 없어도 저자의 입담 덕에 너무너무 재밌게 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발레를 한번 배워 볼까?' 싶거나 발레에 대한 동경이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발레를 해 봤다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길이도 짧으면서 유쾌하고 가벼운 이야기 위주로 출판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보시라.

 

참고로 현재까지 내가 읽은 <아무튼> 시리즈의 책 리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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